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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대통령이 사우디로 날아가시라

바람아님 2017. 10. 3. 08:17
중앙일보 2017.10.02. 01:02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은 8·15 기념사에서 “모든 역사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했다. “19대 대통령 문재인 역시 김대중·노무현만이 아니라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모든 대통령의 역사 속에 있다”는 언급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역사의 빛은 빛대로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문 대통령은 과거 적폐를 청산하더라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추구했던 기술 축적, 인력 개발, 비즈니스 외교는 청산하지 않길 바란다. 대통령이 여러 차례 “탈원전 추진과 원전 수출은 별개”라고 말한 것도 청산과 계승을 분별하는 정신이다.

원자력 기술은 돈도 땅도 자원도 없는 최빈국에서 한국 대통령들이 선택한 빛나는 한 수였다. 국비 유학생들은 두뇌와 책임감과 부지런함으로 선진 기술을 습득했다(이승만·박정희 시대). 한국인의 힘으로 설계·제작·시공·운영·수리를 하는 국산 기술이 확보되자(전두환·노태우) 북한에 한국형 경수로까지 지어주게 됐다(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생면부지 중동의 국왕과 여섯 차례 전화한 뒤 현장에 날아가 세일즈 담판을 한 끝에 대규모 상업형 원전 4기 수출을 따낸 뒤(이명박) 좀 더 기술적 노력을 기울이면 잠수함 장착도 가능한 ‘소규모 스마트원자로’가 개발됐다. 이 기술의 전수 계약을 사우디아라비아와 맺었다(박근혜).

그 사우디가 10월 중 1400㎿급 대형 원전 2기를 짓는 국제입찰을 공고한다. 사업 규모 20조~30조원. 이번에 낙찰받으면 2032년까지 줄줄이 예정된 원전 17기 공사를 따는 데 유리하다. 그런데 주무 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가 결정적 기회를 차버렸다. 문 대통령이 유엔 연설을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 9월 18일의 일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원전 회담에 사우디에선 원전 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부총리급 인사가 나왔지만, 산업부는 과장 직무대행을 내보냈다. 최소한 산업부 장관이 나서야 할 자리에 부처 서기관이 나간 것이다. 유력 경쟁자인 중국이 지난 8월 상무담당 부총리를 사우디에 보내 실권자인 왕세자와 회담을 벌인 것과 대조적이다. 탈원전 운동을 하던 사람이 주무 장관 자리에 앉아서인지 청와대에 탈원전 소신파가 많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탈원전과 원전 수출은 별개”라는 대통령의 약속이 무참히 깨졌다.


추석 연휴 뒤 정부 공론화위원회가 선정한 478명의 시민참여단은 신고리 5, 6호기 원전을 계속 건설할 것인지, 영구 중단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사우디가 국제입찰 때 제시할 노형(爐型)과 똑같은 1400㎿급 가압형 원자로다. 사우디는 스마트 원자로 기술을 전수받으려 수십 명 인력을 한국에 파견할 만큼 호감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산업부가 원전 수출에 소극적인 이유는 뭘까. 적극적으로 노력할 경우 시민참여단 사이에 신고리 5, 6호기에 대한 호감이 늘어 ‘건설 계속’ 쪽으로 투표할 것을 염려한 꼼수가 아니길 바란다.


기회가 아주 사라지진 않았다. 문 대통령이 세일즈단을 이끌고 사우디로 날아가 정상회담을 하면 반전의 문이 열릴 것이다. 최고 통치자의 정성과 의지를 읽게 되면 기술 면에서 우위에 있고 호감이 더 가는 한국형 원전을 사우디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의 전략적 위치상 미국도 우리를 지원할 것이다. 국부가 수십조원 늘어나고 연인원 일자리 수십만 개가 창출되는 역사적 과업이다. 대통령은 사우디로 날아가시라. 일자리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다. 답답한 국민들에게 큰 추석 선물이 될 것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