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0.10 팀 알퍼 칼럼니스트)
한국 남자, 면도 쉽게 쓱쓱… 털 많은 서양인은 30분 걸려
시대·종교 따라 수염도 변화, 이슬람은 턱수염 기르지만
세속주의 중동인은 콧수염만… 가톨릭·정교회 분열도 일으켜
팀 알퍼 칼럼니스트
드디어 기나긴 여름이 끝났다. 한국의 여름은 긴 일조 시간과 시원한 수박이 있는
매력적인 계절이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목욕탕 저리 가라 할 후텁지근한 습도다.
이제 정기적으로 목욕탕에 갈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다.
나는 한국 대중목욕탕의 열렬한 팬이지만 목욕탕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 남자들이 면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면도는 무척 쉬운 일처럼 보인다.
셰이빙폼도 없이 플라스틱 일회용 면도기로 쓱쓱 대충 몇 번 밀면 그만이다. 몇 초도 걸리지 않고 거울을 볼 필요조차 없다.
기회가 있다면 나처럼 얼굴에 수염이 잔뜩 난 서양인의 면도 장면을 관찰해 보라.
우선 우리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소품처럼 생긴 배터리를 장착한 고성능 면도기가 필요하다.
거품이 잔뜩 나는 대용량 셰이빙폼도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면도를 하면 면도기에 베인 자국과 면도로 인해 생긴
뾰루지들로 가득한 얼굴이 될 것이다. 가끔 면도하면 완전히 수염을 깎는 데 30분 이상 걸린다.
수염은 내가 글쟁이란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나처럼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컴퓨터 모니터 뒤에 산다.
몇 주 동안 면도를 안 하고 수염을 마음껏 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털 많은 서양인이 면도하지 않은 얼굴로 돌아다녔다간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위협을 느낄 것이다.
대중목욕탕에서 무성하게 자란 수염을 밀기라도 한다면 배수구가 막혀 영원히 출입금지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갈수록 몸단장에 게을러지고 있는 나는 자신에게 묻곤 한다.
수염을 한번 길러보면 어떨까? 헤밍웨이, 프로이트, 셰익스피어, 도스토옙스키, 디킨스 등 수많은 유명 작가가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가. 한국의 옛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세종대왕, 율곡, 원효대사가 수염을 길렀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아시아 남성과 서양 남성의 수염엔 큰 차이가 있다.
서양인의 수염은 굵고 곱슬기가 있어 수염이 덥수룩해 보인다. 반면 한국 남성의 수염은 아래를 향해 자라며 대개 입술과
턱 주변에만 있다. 마르크스 스타일의 덥수룩한 수염과는 전혀 다르다. 서양인이 보기에 한국 남자의 수염, 특히 나이 든
한국 남자의 수염은 주옥같은 명언을 쏟아내는 공자 같은 현인 이미지를 풍긴다.
한국인은 대부분 깨끗이 면도한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예외가 있다. 차승원에게 수염은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존재이다. 조각처럼 잘 다듬은 세련된 이미지를 풍기면서도 수염을 기른 이를 마주칠 때도 있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수염을 기를지 말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된다.
일부 종교의 수염에 대한 지침은 해당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독단적이거나 완전히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 있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몸에 난 모든 털을 밀라고 했다.
다수 이슬람교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수염을 길게 기르지만 콧수염만큼은 밀어버린다.
반면 세속주의를 따르는 중동인들은 오히려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뺨과 턱의 수염을 깨끗하게 미는 것으로 이런 지침을
강하게 거부한다.
군부대에 콧수염만 기르라고 명령했던 사담 후세인이 바로 그 예다.
기독교와 수염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초기 교인들은 수염을 기르는 것을 덕목이라 생각했고 당시 묘사된 예수는 대부분
휘날리는 수염을 갖고 있다. 그러나 9세기 기독교 내부 갈등이 깊어지자 수염이 분열의 한 가지 원인을 제공했다.
서쪽의 로마 가톨릭은 수염 없는 모습을 선호한 반면 동쪽의 그리스 정교회는 수염 있는 얼굴을 경건함의 징표로 여겼다.
이들의 갈등은 11세기에 이르러 극심해졌다. 서방 교회의 추기경이 수염을 문제 삼아 동쪽 비잔틴제국 전체를 파문하려 하자
비잔틴 또한 수염 없는 얼굴을 이단으로 지목하며 서쪽 세계 전체를 파문했다.
최근 영국에서 수염은 다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사실 영국에서 수염은 몇 년마다 유행을 타고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반면 한국에서 수염 기른 한국 남성을 마주친 횟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내 결론은 일반적으로 한국 남자는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수염을 기른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릴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 남성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를 만큼 털이 많지 않다.
그러니 면도기로 쓱쓱 몇 번 긁어주면 깔끔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 반대다. 수염을 기를 수 있지만 내게 면도는 길고 지루한 작업이며 수염을 기르는 동안 수염은 끊임없이
내 얼굴을 간질인다. 그럼에도 어느 쪽이 내게 더 나을지 결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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