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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칼럼] 촛불시위의 결과가 직접민주주의인가

바람아님 2017. 10. 12. 08:46
중앙일보 2017.10.11. 01:41

직접민주주의가 대의제보다
낫다는 대전제는 오해에 기반
위임받은 권력을 잘 활용해
사려깊은 진보가 개명된 보수와
경쟁하면서도 타협·협력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가 절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정치학
더불어민주당 정당발전위원회는 최근 “당원 주권, 당원 결정 시대”를 목표로 하는 당 혁신안을 결정하면서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당 실현을 천명하고 나섰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집권여당이 대의제가 아닌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밝힌 것은 실로 희귀한 일이다. 물론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성취한 한국 사회에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는 데는 상당한 진통과 시행착오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면 직접민주주의 논의는 1990년대 초반 시민운동의 대두로 시작해 광우병 파동을 거쳐 최근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잠복하기를 반복해 왔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면, 이전에는 사회운동 진영에서 주로 사용됐던 직접민주주의를 대의제를 대표하는 여당이라는 조직이 하겠다고 나선 점이다.

필자의 우려는 현재의 집권여당이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민주주의를 파당적으로 정의하는 방식을 통해 시민들을 자기 지지세력으로 동원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선 민주당의 직접민주주의 개혁안에 있는 “대의체계의 교정”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체계”를 세운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한국의 현행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초한다고 할 때, 현행 헌법을 개정할 만큼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인지에 대해 개혁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문제를 떠나 직접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보다 더 좋다는 민주당 개혁안의 대전제는 커다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하는 통치체제의 원조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구현된 바 있는 모든 시민이 추첨을 통해 돌아가며 통치자 역할을 담당했던 체제를 모델로 한다. 이를 두고 진보파들은 대의제 민주주의에선 주권자인 시민의 의사와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표의 뜻이 괴리되는 “주인-대리인 문제”가 불가피한 반면, 직접민주주의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발생할 일이 없기 때문에 후자의 모델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현대의 고도로 발전되고 분화된 대규모 사회에서는 과거 소규모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했던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차선책으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표적인 정치학자들은 그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들이 보기에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치체제이며, 대의제는 선거가 있기 때문에 우월한 정치체제다. 선거는 본질적으로 엘리트를 선출하는 방식이고, 따라서 귀족주의적인 제도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선출한 대표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귀족주의의 장점과 평등한 인민주권을 실현하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체제이기에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최장집칼럼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대의제 민주주의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여러 철학자와 달리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가 온건하게 작동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했다. 그는 『정치학』에서 농업에 기초한 사회의 민주주의를 찬양한 바 있다. 이유는 이렇다. 대다수 사람은 생업인 농사일에 바빠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갖기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아테네인들처럼 추첨으로 공직자를 선발하기보다 선거를 통해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했다. 생업의 자유를 위해 통치 역할을 선출된 대표에게 전담케 한다는 발상은 현대 자유주의에 기초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와도 맞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 사례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현대 미국에서 공화-민주 양당의 영향력이 약한 서부 여러 주에서 나타난 직접민주주의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70년대 이후 시민 발의와 주민투표로 결정된 주요 법안들이 미국의 ‘운동 보수주의’를 불러왔던 사례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주지사 소환제 역시 장기적 효과를 갖는 정책 결정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처음 주민투표가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지난 촛불시위의 결과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어떤 긍정적인 효능을 갖기 위해서는 진보적 정부가 모처럼 부여받은 기회를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잘 운영해야 한다. 그것은 사려 깊은 진보와 개명된 보수가 상호 경쟁하면서도 타협하고 협력하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