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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러시아혁명과 인간, 그리고 종교

바람아님 2017. 11. 10. 08:41


중앙일보 2017.11.09. 02:08


레닌혁명 100년, 종교개혁 500년 더 나은 세상 원하는 인간의 바람
사회주의 죽어도 마르크스 안 죽어 영국 자본주의 비결은 청교도 정신
참된 인간 혁명은 사회주의 아니라 종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7년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러시아 왕조를 전복시킨 임시정부를 다시 무너뜨리고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한 소련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이 없어진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믿고 실천에 옮겼다, ‘신성한 노동을 시장에 팔게 만든 물신화(物神化)의 주범’인 화폐를 없애고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나섰으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성의 기적이 일어나기는커녕 1921년의 공업 생산량은 혁명 이전 수준의 3분의 1로 줄었으며 1920년대 초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아사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1992년 여름, 필자는 연구를 위해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다.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이 실패했음이 확연히 드러난 현장이었다. 모스크바 곳곳에 녹슨 자동차와 버스, 심지어 기차까지 너부러져 있었다. 국영상점은 물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 아파트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인도 있었고, 지하철역 주변에는 생계를 위해 집에 있는 온갖 것을 가지고 나와 팔려는 사람들로 큰 난전이 만들어졌다. 흑빵 한 덩어리로 며칠을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절망감과 당혹감에 눈물 흘리는 러시아인도 많았다.


사회주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체제였다. 문맹률을 단시일에 낮추고 남녀평등을 신속히 제도화한 것 이외에는 그 공을 찾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소련 사회주의보다 더 거짓된 선동으로 2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잘못된 체제와 악한 권력 때문에 고귀한 인간의 생명과 소중한 자유가 사라졌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체제가 바뀌면 인간의 이기심이 용해된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해악을 끼친 거짓말이 됐다. 사회주의가 붕괴하느냐 아니면 붕괴 없이 자발적으로 이행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그 후 모든 사회주의 경제는 예외 없이 자본주의로 전환했다. 북한도 이 길을 가지 않을 도리는 없다.

김병연칼럼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인간의 바람이 죽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환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는 죽지 않는다. 극소수의 귀족이 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를 압제했던 러시아가 바로 그랬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무르익게 한 현장인 영국에서는 그의 예견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높은 윤리의식으로 사회적 책무를 감당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검약과 성실,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 정신으로 무장된 청교도의 후예들이 영국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감을 받은 신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학교와 병원을 짓고 약자를 돌봤다. 중산층이 앞장섰고 귀족이 도왔으며 노동자 계층도 동참함으로써 나눔이 일상화됐고 배려가 생활이 됐다. 양심의 변화가 나라를 갈아엎었다. 참된 인간 혁명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좋은 본과 그들의 희생을 통해 배운다. 문제는 한국에선 그런 본과 희생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삶이 너무 고됐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서 그렇다. 세계가치관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물질주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이익을 위해 때로는 법을 ‘살짝’ 어기거나, 때로는 그 촘촘한 법망을 요리조리 잘 피하는 현란한 스킬의 사람들로 청문회장은 늘 소란하다. 국민은 본이 되는 사람을 찾고 싶은데 정치는 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보수 정부에서 찢겨졌던 마음이 진보 정부에서도 무너진다.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이 겹치고 있다. 이 우연한 중첩이 한국 사회에는 범상치 않은 경고로 들린다. 최근 한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아들이 이어받게 한 결정은 한국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종교가 현세의 이익을 초월하지 못하면 사회는 탐욕으로 부패한다. 종교의 초월성에서 나오는 본과 희생이 사회에서 사라지면 또 다른 혁명의 망령이 싹틀 수 있다. 그 망령은 러시아처럼 폭력적 혁명으로 나타나진 않겠지만 민주주의와 영혼 없는 자본주의의 위태로운 결합을 틈타 증오와 갈등, 포퓰리즘과 정치 불안으로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이 될 가능성은 상당하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