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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수능을 앞둔 학부모로서 해보는 생각들

바람아님 2017. 11. 22. 09:19
중앙일보 2017.11.21. 02:20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나는 수능을 이틀 앞둔 수험생의 학부모다. 서울 강남에 살고 특목고 다니며 대치동 학원을 열심히 다니는, 그런 학부모인 주제에 염치없지만 그래도 안쓰럽다. 어쩜 이리 챙겨야 할 것도 많고 복잡한지. 답답한 마음에 어차피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단순명쾌한 옛날 학력고사가 공정하지 않을까 하는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랬더니 전문가들이 그거야말로 나 같은 강남 학부모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고, 수능 성적 줄 세우기를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편중이 극심해질 거라고 일깨워주었다. 우리 사회의 교육 격차는 이미 그 정도라는 것이다.
일상有感 11/21
미국의 경우에 관한 책을 읽었다.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다. 밴스는 약물중독, 폭력이 만연하고 교육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빈곤층 문화 속에서 자랐다. 고교 시절 결석·지각을 수십번 했고, 쉬운 수업에서도 C학점을 받곤 했다. 주립대학에 진학하려 했지만 학비 대출을 감당할 수 없어 해병대에 입대한다. 제대 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용기를 내 예일 로스쿨에 지원한다. 미국 명문사립대는 엄청나게 비싸지만 빈곤층에겐 오히려 싸다. 풍부한 장학금 때문이다. 위스콘신대에 가면 1만 달러를 내는데 하버드에 가면 1300달러만 부담하는 식이다. 그는 예일 졸업 후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며 전 세계에 빈곤 노동계층의 실상을 절절히 알리는 좋은 책을 썼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 곳곳에 있을 밴스들에 비해 내 아이는 얼마나 좋은 여건에서 공부하는지 생각했다. 요즘 대학가에는 지역균형·기회균등·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선발된 학생들을 비하하는 학생이 일부 있단다. 죽도록 노력했는데 역차별당했다는 억울한 감정도 알겠다. 하지만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 진창길 100m를 홀로 뛴 선수와 일류 코치의 도움을 받으며 매끈한 트랙 100m를 뛴 선수의 기록을 똑같이 비교하는 게 공정할까? 밴스의 경우처럼 잠재력은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꽃을 피운다. 게다가 인간은 어차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다양한 곳에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사회 전체에 힘을 준다. 재난을 당한 경쟁자들을 위해 모두가 참고 기다려준 이번 수험생들은 그래서 더 큰 것을 배우며 시작하는 것이다. 일주일 더 버티고 있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지만 말이다.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