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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혹등고래, 노부모, 그리고 휠체어를 탄 딸

바람아님 2017. 8. 30. 09:46
중앙일보 2017.08.29. 02:44 수정 2017.08.29. 06:36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저자
혹등고래는 남극의 여름에 하루 1t 이상 크릴새우를 먹어치운다. 겨울이 오면 따뜻한 호주 북동 해안까지 수천㎞를 헤엄친다. 새끼를 낳기 위해서다. 새끼는 피하지방이 부족해서 남극의 겨울을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열대의 바다에는 어미의 먹이가 없다. 어미는 새끼에게 하루 400L 가까운 모유를 먹이는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어느 해 8월, 나는 호주 탕갈루마 섬에서 고래 관찰선을 탔다. 2층짜리 배는 작았고 파도는 거칠었다. 눈에 띄는 가족이 있었다. 머리가 희고 등 굽은 노부부와 딸이었다. 무뚝뚝한 인상의 노부부는 휠체어에 앉은 중년의 딸을 살갑게 돌봤다. 고래를 볼 흥분에 들뜬 승객들 사이에서 딸의 눈만 텅 비어 있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핀란드라고 짧게 대답했다. 노부부는 발달장애인 딸의 휠체어를 밀고 지구 반대편의 섬까지 온 것이다.

드디어 고래가 나타났다. 혹등고래는 가장 호기심 많고 활동적인 고래로 유명하다. 어느 놈은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어 주변을 살폈고 어느 놈은 꼬리로 수면을 내리쳤다. 그러다 드디어 한 놈은 15m의 거구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뒤로 넘어지는 브리칭까지 보여주었다. 승객들은 흥분해 고래가 보이는 쪽으로 이리저리 몰렸다. 배가 옆으로 넘어지지 않나 싶을 만큼. 그때, 갑자기 천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고래가 나타나도 멍하니 있기만 하던 딸이다. 말을 못하는 딸은 몇 분 동안이나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고 노부부는 딸을 안심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승객들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예의 바르게 모른 척했다. 난 마치 인생에 대한 은유 같다고 생각했다. 대자연은 무심하게 아름다웠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쉬운 위안은 없었으며 타인들의 최선은 예의 바른 방관 정도였다.

가까스로 비명이 멈췄고 물결도 잔잔해졌다. 갑판 바로 옆까지 다가온 혹등고래는 눈을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고래의 눈은 무표정한 물고기의 눈과 달랐다. 새끼를 위해 지구 반 바퀴를 헤엄쳐 온 포유류의 눈은 따스했다. 물론 이 시선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위로받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그런 어리석음이라도 있기에 견뎌낼 수 있는지 모른다. 쉽게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 삶을.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