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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만약 인공지능이 재판한다면

바람아님 2017. 6. 28. 09:27
중앙일보 2017.06.27. 03:21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양형이 국민 상식에 비추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으니 차라리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이 낫겠다는 말이 많다. 물론 강한 불만의 표현이지 구체적 제안은 아니겠지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에 재판을 맡긴다면 바둑 규칙과 행마법에 해당하는 기본입력 사항은 법, 양형기준, 법 이론이고 학습 대상인 빅데이터는 수많은 기존 판결례일 게다. 결과는? 오히려 기존 양형례에 철저히 충실할 것이다. 기본입력 사항을 바꾸기 전에는.


그래서 법률과 양형기준을 예외 없이 대폭 엄하게 고치면 ‘알파로(law)’의 형량은 곧바로 무섭게 치솟을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 다른 반응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 법에도 예외가 있고 눈물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참작할 만한 사정이 많은데 너무 기계적이다. 알파로의 대답은? “잊으신 것 같지만 주인님, 저는 기계입니다.” 그래서 참작할 만한 사정과 예외를 또 기본입력 사항에 포함시키기 위해 법률과 양형기준을 엄청나게 세분화하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가치관의 대립이 있는 부분이라 엄청나게 오래 걸린다. 세분화할수록 입법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개별 사례에 대한 재판에 가까워지고 격론 끝에 감정도 상한다. 사람들은 차라리 입법도 인공지능에 맡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게 되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국민이 느끼는 불만은 오히려 판사들이 인공지능처럼, 로봇처럼 판결하기 때문 아닐까. 기출문제 푸는 능력이 최고 수준인 사람들을 성적순 선발한 뒤 신문·뉴스 볼 시간과 독서하고 사색할 시간도, 다양한 사람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서류 읽으며 야근하고, 튀는 판결이 절대악인 분위기 속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조심스럽고, 어쩌다 정말 작심하고 과감한 판단을 하면 곧바로 상급심에서 파기되면서 안 좋은 평판을 얻게 되고, 그 평판과 사건처리율 등을 토대로 근무성적이 평가되어 이른바 엘리트 코스와 그렇지 않은 코스가 나누어지고, 게다가 평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부 집단이 고위직 법관 출신 변호사들에 치우쳐 있고. 이런 구조 속에서는 기존 선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원칙과 선례대로 하는 건 기계가 가장 잘 한다. 인간에게 재판을 맡기는 이유는 때로는 예외도 인정하고 시대 변화도 반영하기 위함이다. 지금 법관들이 대표회의를 열고 시끄럽게 논쟁하는 이유의 근본에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재판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 것이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