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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1인당 국민소득보다 중요한 것

바람아님 2017. 5. 17. 09:13
중앙일보 2017.05.16. 04:02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브렉시트·트럼프 현상·헬조선론은 경제적 합리성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가난한 백인이 자기 동네 마트에서 값싼 중국산 공산품과 전 세계 과일을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혜택이다. 그는 로마 귀족이 소비하던 재화 이상을 소비한다. 미국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헬조선’인이든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는 바로 지금이다. 1인당 국민소득·평균수명·강력범죄 발생률 등 어떤 객관적 지표를 봐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인류의 풍요와 진보를 이끌어 온 공리주의가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심리학과 뇌과학이야말로 최신의 정치경제학이다. 비합리적이고 측정 불가능하다고 보아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던 인간의 마음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이 뇌의 같은 부분에서 처리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진통제는 왕따나 실연으로 인한 고통도 완화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은 놀라운 통찰이다. 빈부격차, 상대빈곤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질병이나 굶주림처럼 실제로 ‘고통’을 줄 수 있다. 조삼모사도 심리학이다. 인간은 현재를 선호하며 미래의 불확실성을 회피한다. 협상으로 얻어낸 아침 사과 네 개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저녁 사과 네 개보다 성취감을 준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은 결국 인공지능과 우주 개발, 인류의 무궁한 진보와 풍요를 말하는 엘리트들에게 우선 아침의 사과 네 개부터 내밀면서 장밋빛 약속을 하라는 글로벌 총파업 아닐까. 역주행의 광기가 아니라 협상안의 요구다.

사람의 마음을 배제한 채 숫자만 들이대며 인간의 비합리성 운운하는 이들이야말로 비합리적이다. 사람의 마음 역시 자동차나 휴대전화처럼 실체가 있다. 국정지표에 ‘마음’을 포함시키면 우선순위가 변할 수 있다. 미세먼지로 새빨갛게 표시된 지도는 실제 호흡기 질환 발병률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에 대책이 필요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대가 갖는 본능적 공포감은 합리적인 외교 협상 이론만으로는 설득되지 않기에 존중해야 한다. 세월호 인양 비용의 합리성은 그 배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의 마음, 그리고 저 컴컴한 바다 밑에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나는 이들의 마음을 장부 한편에 적지 않고는 논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조상들은 이 모든 거창한 얘기들을 한마디로 잘 요약하고 있었다.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