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문유석의일상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지하철 3호선의 기적

바람아님 2017. 3. 14. 23:40
중앙일보 2017.03.14 03:12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지난해 12월 어느 밤, 지하철 3호선에서 겪은 일이다. 귀갓길의 사람들은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각자의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종로3가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제복을 입은 사내가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고함을 버럭 질렀다. 뭘 반대한다, 뭘 해산하라는 구호다. 사람들이 동시에 불에 덴 듯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목청을 높인다. “내가 ~부대 출신인데 말야, 빨갱이들이….”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차내에 불만의 공기가 팽팽하게 차올랐다.


못 견디겠다는 듯 한 중년이 말을 끊는다. “어디서 말 같지 않은 소릴 하고 있어. 거 좀 조용히 갑시다.” “뭐야 이 새끼야! 이런 X신들이 X같이….” 사내는 거침없이 쌍욕을 뱉어낸다. “에이 정말!” “차 안에 애들이 있잖아요!” “얘들아, 귀 막아.” 꼬마 숙녀 둘과 함께 앉은 아빠는 애들 귀를 가렸다.


사람들은 이제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입 닥쳐!” “술 처먹었으면 곱게 들어갈 일이지.” 사내는 물러서지 않는다. “난 일인시위할 권리가 있어!” 해사한 얼굴의 30대 회사원이 받아친다. “알았으니까 일인시위 해! 입은 다물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선글라스 사내는 욕설 섞인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한 노신사,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내뱉는다. “당신도 집에 애들 있지? 부끄럽지 않아?” 그래도 사내의 입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폭발 직전의 표정이다. 여기저기서 짜증 섞인 남녀노소의 목소리가 섞여든다. “아 쫌!!!” “아, 진짜!”


그때 열차가 다음 역 승강장으로 접어들며 속도를 줄였다. “이번 역은…, 내리실 문은….”

그 순간, 거의 동시에 터져나온 함성이 있었다. “내려!!” 사람들은 소리를 쳐놓고도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자기도 모르게 그 한마디를 외친 것이다. 지휘자가 없는데도 신기할 만큼 한목소리로 합쳐져 차 안을 쩌렁쩌렁하게 공명시키고 있었다. 주술적인 힘이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잠시 후 열차는 다시 출발했고, 사내가 있는 쪽은 사람들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와 달리 조용했다. “내렸어?” “내렸지?” 속삭이는 소리가 전달돼 왔다. 꼬마 숙녀들 아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차했네.”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슬쩍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차 안은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가방을 뒤지는 척하며 슬쩍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