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23] 신안 앞바다서 건진 '노다지'

바람아님 2018. 1. 31. 19:03

(조선일보 2018.01.31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75년 8월 전남 신안군에 거주하던 어부 최형근씨는 증도에 딸린 작은 섬 도덕도 해상에서 그물질을 하다

자기(瓷器) 6점을 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 두었던 자기를 무안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동생 최평호씨가 목격해

신안군청에 신고했고, 문화공보부는 평가회의를 거쳐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도덕도 앞바다는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도굴 감시 요원을 매수해 도굴을 자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검경의 도굴범 체포와 장물 압수가 이어졌으나 역부족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은 해군의 지원을 받아 2차에 걸쳐

긴급 조사를 진행, 다량의 유물을 인양했고 선체가 해저에 묻혀 있음을 확인했다.


물소를 탄 동자 모양 백자연적, 신안 해저선, 높이 6.7㎝, 국립중앙박물관.
물소를 탄 동자 모양 백자연적, 신안 해저선, 높이 6.7㎝,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사실이 '노다지 쏟아진 바다의 무덤', '탄성과 흥분의 노다지 해저' 등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신안 해저 유물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급기야 1977년 1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연두순시 석상에서 이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광주에 국립박물관을 신축하라고 지시했다.


1977년 6월에 시작된 3차 발굴은 이전 발굴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계가 좋지 않은 악조건 속에서도 수천 점의 유물이 어느 위치에서 수습되었는지를 하나하나 기록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3차 발굴까지 인양한 주요 유물은 그해 10월 1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전시품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물소를 탄 동자 모양 백자연적과 고려청자 매병이었다.


발굴은 계속 이어졌고 1984년 9월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9년간의 발굴에서 선체와 함께 2만4000여 점의 물품, 약 800만 개의 동전 등이 인양됐다.

신안 해저선은 1323년 원나라를 출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배의 침몰은 크나큰 비극이지만, 그 배는 14세기 동아시아를 마치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간직한 '보물선'으로 재탄생했다.

이 발굴은 국내 수중 발굴의 신호탄이 되었고 그때의 경험은 이후 수많은 침몰선 발굴의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