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 2018/02/03 08:00
2월 3일에는 이런 일이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당장 나가라"
한국전쟁 때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던 순정효황후가 이곳에 쳐들어온 인민군에게 이렇게 호통쳤다고 합니다.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이름이 쉽지 않습니다.
1897년 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황제'나 '황후'의 명칭이 생겼으니, 왕조로 말하면 '조선의 마지막 왕비'입니다. 1966년 2월 3일, 오늘 사망했습니다.
아래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황가의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입니다.
순정효황후는 고종의 아들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계비(두 번째 부인)입니다. 순종의 원래 비였던 '순명효황후'가 일찍 사망해, 1906년 황실에 들어가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후가 됐습니다. 고위관료였던 윤택영의 딸입니다.
강단 있게 인민군을 쫓아냈다는 위의 일화보다 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10년 친일파들이 내전에 쳐들어와 순종에게 한일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이를 엿들은 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는 일화입니다. 친일파였던 황후 큰아버지 윤덕영이 옥새를 빼앗아갔다고 전해집니다.
나이가 스무 살 차이였지만 순종과 황후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사는 없었습니다. 황후로 산 지 약 20년,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습니다.
한국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낙선재에서 쫓아내 정릉으로 보냈습니다. 황후는 그때부터 오랜 싸움을 펼쳤습니다. 1960년 다시 낙선재로 돌아왔습니다. 1963년에는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이은과 이방자)와 덕혜옹주(이덕혜)를 연달아 불러들여 함께 살았습니다. 왕가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이들이 창덕궁에서 나들이하는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입니다.
영친왕은 고종의 아들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순종이고, 고종과 귀비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번째가 영친왕입니다.
영친왕은 1926년 순종이 사망한 뒤 직위를 계승했으며(황태자)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있던 중 일본 왕족 출신인 마사코와 정략 결혼합니다. 마사코의 한국 이름은 '이방자'입니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입니다. 1912년생입니다. 옹주란 후궁의 딸을 말합니다.
영화 '덕혜옹주'를 통해 그의 삶은 잘 알려졌습니다. 어릴 적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에는 일본으로 끌려가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1963년 정신병을 앓던 중 낙선재로 돌아왔습니다.
순정효황후 윤 씨는 1966년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1970년 5월, 낙선재에서 사망했습니다.
덕혜옹주 이덕혜는 1989년 4월, 낙선재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습니다.
옹주와 의지하며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도 옹주가 죽은 지 불과 9일 뒤에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왕가의 쓸쓸한 인생입니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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