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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신임받은 광해군 배신한 허균 | 신분제·왕조 부정..차별 없는 세상 꿈 못 이뤄

바람아님 2018. 2. 6. 09:13
매경이코노미 2018.02.05. 09:45
지난해 최고 정치적 이슈는 대통령 탄핵이었다. 정치가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비판을 받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받는 ‘탄핵’. 조선시대 정치가도 ‘탄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중에서 ‘탄핵’을 수도 없이 많이 당했던 이가 있다. 허균(許筠, 1569~1618년)이다.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끊임없이 그에 대한 탄핵이 가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부정적으로 기술된 인물이기도 하다. ‘홍길동전’ 저자로 익히 알려진 허균이 정치적으로 왜 이토록 기피 인물이 됐던 것일까.


허균은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거친 문장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개혁가였다. 한국사에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했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흔치 않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과격하고 직선적이며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 행동가적인 성향 때문에 끝내 그는 처형됐다.

양천 허씨 명문가 집안 자식이었던 허균은 1569년(선조 2년) 11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허엽과 강릉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초당을 호로 삼은 것은 그의 처가인 강릉 초당과 관련 있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조그마한 야산이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蛟山, 교는 이무기의 뜻)이라 불린 곳이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에서 나왔지만 자신의 이상을 펴지 못한 채 처형된 이무기와 같은 그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허봉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조선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詩才)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허균이 훗날 서자인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한 ‘홍길동전’을 저술한 것도 스승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17세가 되던 1585년에는 김대섭의 딸과 혼인했다. 1597년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늘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20여년 관직 생활 동안 파직과 복직이 되풀이되는 삶을 살았다. 황해도 도사 시절인 1599년 기생, 무뢰배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처음 파직된 이래, 부처를 섬기고 불교를 신봉한다는 탄핵을 받아 1604년(선조 37년)과 1607년 수안군수와 삼척부사에서 각각 파직됐다. 삼척부사에서 파직된 직후에는 공주목사에 임명됐다. 공주목사로 있으면서 파직되기까지 8개월 동안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홍길동과 같은 처지인 서자들과 긴밀한 교류가 이뤄진 시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심우영과 이재영 등 서자들을 공주 관아에 식객으로 맞이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꿈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관직 생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기생이다. 허균이 처음 파직된 것은 “서울에서 창기들을 불러 모아놓고 따로 관아까지 만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1604년의 실록에는 “일찍이 강릉 땅에 갔을 때 기생에게 혹해 그의 어머니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허균 문집에는 그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는 부안 기생 매창을 비롯해 광산월, 낙빈, 선래, 춘방 등 다양한 기생이 등장한다.


허균 학문과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 등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는 점이다. 16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정착된 성리학은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로 자리 잡았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단칠정론과 같은 이론 논쟁을 수반했다. 이론 논쟁은 성리학 이론을 깊이 연구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요인도 있었으나, 실사(實事)보다는 공담(空談)을 위주로 하는 풍토를 조성해 사회 문제 해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허균은 성리학 이론 논쟁에 빠져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을 찾았다.


허균의 박학과 개방적인 사상은 논설을 통해 사회 개혁 의지로 구체화됐다. ‘관론(官論)’에서는 관원이 너무 많아 기구와 관료를 줄여 국고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록론(厚祿論)’에서는 관리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의 후한 녹봉을 줘야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했으며 ‘병론(兵論)’에서는 모든 계층이 고르게 군역 의무를 져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개혁 의지가 가장 잘 피력된 글은 ‘유재론’과 ‘호민론’이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서출이라 해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조선에만 국한된 점임을 지적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많은 사람들의 불만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호민론’은 허균의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글이다. 허균은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라고 전제한 후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눴다. 여기에서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지만 원망만 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한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해 무도한 무리를 물리친다는 것이 허균의 호민론이다. 특히 호민론은 ‘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허균은 선조대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올랐지만 잦은 돌출 행동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그러던 그에게 본격적으로 정치적 위기가 닥친 것은 1613년 7명의 서얼이 주도한 계축옥사였다. 서얼의 실질적인 후원자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 사건 이후 허균은 요주의 대상이 됐다. 이런 혐의를 피하기 위해 허균은 당시 대북 정권 최고 실세이자 글방 동문이었던 이이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이첨의 후원 속에 허균은 집권 대북 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광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 잡았다. 허균은 폐모론(廢母論) 같은 정국의 최대 이슈에 직면해 인목대비 처벌을 강경하게 주장함으로써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대북 세력 행동대장 역할을 맡으면서 허균에 대한 광해군의 신임은 커져 호조참의, 형조참의를 거쳐 좌참찬까지 오르게 된다. 그의 장기인 외교력과 문장력을 발판으로 외교사절로 두 차례나 명나라도 다녀왔다.


광해군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허균은 내면적으로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위험한 발상을 한다. 만주에서 흥기하는 후금 세력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기회로 삼았다. 거사를 위해 기존 소외받던 수백 명 승군과 무사, 서얼을 비밀리에 동원했지만 반대 세력에 의해 움직임이 포착됐다. 1617년 12월 기준격은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문을 올렸다. 기준격은 처음엔 허균 동료였지만 인목대비 폐출을 계기로 반대 정치 노선을 걸었던 기자헌의 아들이다. 허균의 제자이기도 했던 기준격의 고변 상소로 허균은 궁지에 몰린다.


허균은 즉각 반박 상소를 올리며 반격하지만, 인목대비 폐출을 반대하던 각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곤혹스런 입장에 놓였다. 설상가상 허균의 역모를 확증하는 격문이 1618년(광해군 10년) 8월 10일 남대문에 붙었다.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내용의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이 한 짓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허균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됐다. 허균은 죽는 순간까지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를 변호하는 이는 없었다. 1618년 8월 24일 허균은 현응민, 우경방, 하인준 등의 동지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되면서 50세 생애의 마침표를 찍었다.


허균의 비극적인 생애는 무엇보다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不與世合)’하는, 즉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그리고 자유로운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했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허균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려 했지만, 생각만 앞섰던 무리한 시도는 역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성리학 질서만이 지배되던 사회 흐름을 바꿔보려 했던 허균의 시도는 개혁의 불씨로 남아 새로운 사상이 자리를 잡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불후의 명작 ‘홍길동전’ 유통과 보급은 그가 지향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은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관심 가져주셨던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44호 (2018.1.31~2018.2.06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