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2.1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산경문전(山景文塼), 보물343호, 외리 유적, 국립중앙박물관.
1937년 4월 18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무촉탁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나무뿌리를 캐던 농부가 우연히
문양전을 발견, 신고한 게 계기가 되어 보름간 긴급 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조사 대상지는 야트막한 야산의 서쪽 사면이었는데, 농장이 들어서면서 원지형이
크게 훼손됐고 오래되지 않은 무덤 20여 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발굴할까 고민하다 유물 발견 지점부터 파보기로 했다.
교란된 구덩이를 기점으로 북으로 가면서 흙을 조금씩 제거하니 기와편과 점토를 교대로 쌓아 만든 담장 기초 시설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북쪽으로 9m나 이어졌다.
담장 시설 바깥쪽을 더 파내자 문양전(文樣塼) 30개가 보도블록처럼 깔려 있었다.
물로 씻어가며 문양을 표출하니 화첩을 길게 펼쳐낸 듯 유려한 무늬가 파노라마처럼 드러났다.
연꽃, 구름, 봉황, 용, 괴수 등 삼국시대 유물에서 종종 보이는 무늬가 많았지만 특이한 것도 있었다.
날카롭게 솟은 암벽과 동글동글한 산, 그리고 산 위에 오밀조밀 심어진 나무에 이르기까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도안이었다. 더 세밀하게 살피니 봉황, 스님, 절이 조각된 것도 있었다.
5월 3일 조사를 마칠 때까지 정연(整然)한 건물지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양의 유물을 수습했다.
문양전은 8가지 종류였고 전체 150여 점 가운데 완형은 42점이었다.
이 문양전 가운데 일부는 1963년에 이르러 보물로 지정됐다. 그런데 이 유물들은 현재 국내에 모두 남아 있지 않다.
발굴 후 조선총독부 외곽 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가 외리에서 발굴된 문양전 12점을 도쿄 제실박물관(현 도쿄 국립박물관)과
교토대학에 임의로 기증함에 따라 백제 미술의 정수는 이산가족 신세가 돼 버렸다. 문화유산도 식민지 시기의 고통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외리 문양전에는 그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아픔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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