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3.07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27년 4월 30일. 공주군보승회장 명의의 공문이 조선총독부로 접수됐다.
공주군 장기면에 백제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릉(武陵)이 있는데, 백제문화 해명과 지역 발전을 위해 발굴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계룡산 학봉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발굴하던 촉탁 노모리 겐(野守健) 일행에게 무릉 발굴을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14일. 노모리 겐 일행이 무릉이라 불리는 곳 여기저기를 파보았지만 무덤이라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발굴을 중지한 그들은 대신 발굴할 곳을 모색했다. 그때 공주군수로부터 "금년 3월 송산리에서 고분이 도굴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튿날 바로 조사를 시작해 9일 만에 백제 왕릉급 무덤 4기를 발굴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송산리고분군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은제허리띠장식, 송산리4호분, 국립공주박물관
무덤은 깬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만든 석실분이었고 도굴꾼들이 훑고 간 자리에는 목관 조각과 함께 약간의 유물이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은 은제 허리띠 장식으로, 혁대에 부착하는 네모난 부품 아래에 하트형 수식이 달려 있었다.
발굴 후 이 유물은 오랫동안 백제산으로 여겨졌지만 연구가 진전되면서 5세기 말 신라에서 전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라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허리띠가 어떤 연유로 백제 왕족 무덤에 묻힌 것일까? 교류 과정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그 무렵 백제에 이미 백제만의 관복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주관하는 공식 행사에서 다른 나라 관대를 착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송산리 4호분이 만들어지던 5세기 말 백제에겐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동성왕은 곳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고, 493년 국혼(國婚)을 통해 신라와의 공조를 강화했다.
송산리 4호분에 묻힌 인물을 이 국혼의 여주인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유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국에서 살아야만 했던 신라 출신 왕비의 소중한 보물이자 나제(羅濟)동맹의 생생한 물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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