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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18] 취객의 목을 베 강에 던져버린 충무공

바람아님 2018. 3. 10. 08:33

매일경제 2017.06.02 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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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 그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긴 귀영개(貴永介)가 조선에 망명한 것으로 성대중은 소개한다.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18] 후금(청나라)을 건국한 누르하치(奴兒哈赤·1559~1626)는 모두 16명의 아들이 있었다. 누르하치가 사망한 뒤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인물은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 또는 洪太時·1592~1643)였다. 홍타이지는 청태종으로 우리에게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안겨준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맏아들(장남이 사망해 실제로는 둘째)은 귀영개(貴永介)였지만 동생 홍타이지가 두려워 황제 자리를 양보했다.귀영개는 그러고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처자를 데리고 조선으로 도망쳐 왔다.

영·정조 연간의 서얼 출신 문인인 성대중이 저술한 '청성잡기(靑城雜記)'는 조선으로 망명한 누르하치의 장남 이야기를 전한다. 책은 교훈이 될 만한 야사 또는 민담, 격언이 될 만한 문구 등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성리학적인 담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게 풀어낸다.

조선은 귀영개와 그의 가족을 푸대접했다. 포로 취급을 받아 곤궁하고 굶주렸으며 자식들 혼인도 제대로 치르지 못해 두 딸을 무인 박륵에게 첩으로 줄 수밖에 없었다. 딸은 아들 둘을 낳았다. 홀대받던 귀영개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양부사 윤계(尹棨)를 죽이고 다시 청나라에 항복했다. 청태종이 따뜻하게 맞아줘 딸이 조선에서 낳은 외손자 2명과 함께 심양으로 되돌아갔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귀영개의 충심을 받아들여 후하게 대접하고 병자호란 초기에 그에게 북쪽 지역의 군사를 줘 만주로 쳐들어가게 했다면 오랑캐들이 군대를 돌렸을 것"이라며 "진귀한 보배가 제 발로 들어왔는데도 쓸 줄을 몰랐으니 애석할 따름"이라고 아쉬워했다.

누르하치의 첫째 아들이 조선에 망명했다가 다시 돌아간 사실은 실록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광해군 13년(1621) 9월 10일 기록에 따르면 여진 진영을 다녀온 만포첨사 정충신은 "귀영가(貴盈哥·귀영개)는 보잘 것 없이 평범한 사내였고 홍태주(洪太主·홍타이지)는 똑똑하고 용감하나 시기심이 많고 아비의 편애를 믿고 형을 죽이려는 계책을 몰래 품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사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우리나라에는 많은 명나라인이 망명해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효종은 귀국하면서 명나라 말기 명신 왕집(王楫)의 아들 왕봉강(王鳳崗)을 포함해 왕문상(王文祥), 풍삼사(馮三仕), 유허롱(柳許弄), 왕미승(王美承), 유자성(劉自成), 배성삼(裴成三) 등 다수의 명나라 사람을 데려왔다.

효종은 이들에게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이들은 명나라가 다시 회복될 때를 기다려 돌아가겠다며 벼슬을 거절했다. 임금은 그들을 훈련도감에 소속시키고 정부에서 생활용품을 받아 쓰게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후손은 벼슬을 하지 못해 모두 평민이 됐다. 숙종이 대보단(大報壇·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던 명나라 신종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쌓은 제단)을 설치하면서 명나라 망명자의 후손들을 분야별 책임자로 쓰려고 하자 병조(兵曹)에서 반대했다. 저자는 "중국인들이 삼국시대에는 귀족도 되고 고려시대에는 본관을 받고 크게 집안이 번성했다. 그러나 명나라 유민들은 선비 축에도 끼지 못하니 어째서 고금이 같지 않은가"라고 개탄했다.

책은 다양한 인물의 숨겨진 비화를 소개한다. 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책에는 다른 일화를 서술한다. 둘의 첫 만남은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 경과한 관직 진출 이후다. 서애가 홍문관 관리로 있을 때 고향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사람들이 앞다퉈 배에 오르려다가 소란이 벌어졌다. 취객이 홀로 말을 끌고 배에 탄 평복 차림의 사람을 향해 새치기를 했다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싸움을 피했다. 서애는 "속으로 나약한 자"라고 생각했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말을 몰던 사람이 먼저 내렸고 취객은 뒤따라오면서 또다시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평복 차림은 취객 목덜미를 움켜잡은 뒤 칼을 빼 목을 베고 강물에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 크게 놀라 넋을 놓고 있는 틈에 평복 차림은 말에 올라 곧장 사라졌다. 서애는 후일 군영에서 그를 다시 만나는데 그가 바로 충무공이었다. "서애가 공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이 일에서 비롯됐다"고 책은 적었다.

충무공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다를 잘 알고 있어서였다. 충무공은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까지 수군 경력이 일천했다. 좌수사로 부임된 후 그는 날마다 포구의 백성들을 불러놓고 술과 음식을 마련해 대접했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그를 두려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됐다.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를 잡고 조개를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곳은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는 말을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접 나가 조사했다.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번번이 적들을 이런 험지로 유인했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했다. 후대에 송시열은 이 일화를 얘기하면서 "장수뿐만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 병사들은 적을 맞아 도망가기 바빴고 병자호란 때도 적에게 죽은 병사보다 자살한 군사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군은 형편없는 겁쟁이였을까. 태어나면서부터 겁쟁이인 민족이 있을 리 만무하다. 병사들의 전투 경험 부족과 제도의 부재가 나약한 군대를 만들 뿐이다. 명나라 장수 유정은 묘족 병사들을 데리고 조선에 왔는데 이들은 용맹스러워 귀병(鬼兵·신출귀몰한 병사)으로 불렸다. 하지만 순천전투에서는 왜구의 맹렬한 위세에 지레 기가 꺾였다. 중국 군대도 겁에 질려 쉽게 나서지 못했다. 조선군만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봉으로 나왔다. 유정은 중국으로 돌아갈 때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인을 다수 데려갔다. 유해(劉海)라는 인물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진주 사람으로 본래 신씨(愼氏)였지만 유정의 성을 따라 유씨로 바꿨다. 청나라도 조선 군대의 맹렬한 기세를 높이 사 군사를 모집할 때 값을 더 올려 쳐주었다. 저자는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가장 나약하니 이는 기가 변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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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보물 1927호 박동형의 분무공신 초상. 이인좌의 난 때 자신이 모시던 박필현을 고발해 공신에 올랐다.
정해진 운명이란 게 과연 있는 걸까. 박필현(1680~1728)은 의금부도사를 지냈지만 노론 세력과의 불화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영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란에 가담했다. 박동형(1695~1739)이라는 사람이 종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섬겼다. 관상을 볼 줄 알았던 박필현은 박동형에게 "꼭 귀하게 될 상"이라고 했다.

난이 일어나자 박필현은 태인(정읍)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박동형을 불러 고을에서 거둔 세금의 절반을 주면서 "일이 성공하면 곧바로 너를 태인현감에 제수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하면 네 집에 숨을 것이다. 그때 너는 이 돈으로 나를 먹여 살려라"고 했다. 반란이 실패하자 박필현은 박동형의 도움으로 아들 등 식솔들과 함께 상주에 숨었다. 하지만 박동형은 박필현의 은신처를 관에 고한다. 박필현은 아들과 함께 참수되고 박필현의 포획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박동형은 반란에 가담했는 데도 공신에 올랐다. 저자는 "박필현은 박동형이 반드시 귀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자기로 인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라고 논평했다.

박엽(1570~1623)이 평안감사로 근무할 때 중국 사람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보았다. 점괘는 "일만(一萬)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나왔다. 박엽은 이 말을 믿고 형벌을 남용해 사람을 죽였으나 1만명을 모두 채우기 전에 자신이 처형됐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저자는 "박엽을 죽이도록 한 사람은 반정의 주역 김자점(1588~1651)인데 김자점의 어릴 때 자(字)가 바로 일만이었으므로 점괘는 틀린 게 아니다"고 했다.

저자는 제도적 개선점도 다수 언급한다. 조선에 와서는 고려 왕조의 3대 폐단을 뿌리 뽑았다. 동성혼 금지, 불교 배척, 무신 차별이 그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고려는 신라의 동성혼을 피하지 않아 공주가 다른 성씨에게 시집간 경우는 왕조 전체를 통틀어 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조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바로 잡아 다른 성씨임에도 7촌, 8촌까지 서로 결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병력이 약화된 것은 전적으로 무신을 억제한 데 기인하며 불교와 승려를 극도로 억압한 것도 백성 입장에서는 이로운 일이 아니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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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이삼 장군 초상. 조선은 무인을 홀대해 군사력이 약했다. 날렵하면서도 다부진 이삼 장군의 모습에서는 강한 조선 무인의 기상이 엿보인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진가를 인정받는 온돌의 폐해도 거론된다. 인조 때 도성의 내사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임금이 대책을 고심했다. 김자점의 건의로 도성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도록 하자 얼마 되지 않아 온 나라로 확산됐다. 하지만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갈수록 부족해졌다. 저자는 "내가 일본에 가보니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했다. 나 역시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난자가 없으니 습관 들이기 나름"이라고 했다.

▶성대중(成大中·1732~1809)=서얼이었지만 서얼에게도 벼슬을 줘야 한다는 영조의 방침에 따라 1756년 정시문과에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했다. 1763년에 통신사 조엄을 수행해 일본을 다녀왔다.
노론 성리학파(낙론계)와 북학파의 중간적 입장을 견지했다.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청성잡기'는 1790년부터 1801년까지 저술했다. 청성은 그의 호다.

[배한철 영남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