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3.1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토제거푸집, 경주 황성동유적, 국립경주박물관.
1989년 8월 24일. 경주 황성동 주공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유적 존재 여부를 확인하던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거푸집에 오목하게
패인 홈이 신라 무덤 출토 쇠도끼와 비슷했다. '신라가 어디서 어떻게 철기를
만들었을까?'라는 오랜 숙제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환호했다.
1990년 4월 22일. 경주박물관·경북대박물관·계명대박물관이 공동으로 조사단을 꾸려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철기 생산의 여러 공정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차례로 드러났다.
석 달 뒤 이영훈 경주박물관 학예관은 유적의 성격을 "주조와 단조 공정이 공존하는 신라 초기의 제철 단지"라 설명했고,
그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학계의 반향은 뜨거웠다.
8월 27일에 전해진 황성동 유적 시료 분석 결과서에 '자철광이 원료로 사용되었고 철에 비소(砒素)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나라 철광산 중 비소의 함량이 높은 곳은 울산 달천광산이므로 황성동 제철 단지에서
사용한 철광석 산지가 울산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황성동 일대에서는 제철 유적과 함께 제철에 종사하던 대장장이들의 마을과 무덤이 다수 발굴됐다.
조사 결과 유적은 경주 시가지의 서쪽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 동쪽에 넓게 분포하며, 마을과 무덤은 서로 조금
떨어져 있고 그 중간 지대에 생산 시설이 밀집해 있음이 밝혀졌다.
고대 사회에서 철기는 매우 중요한 재화였다.
황성동 유적은 신라가 초기부터 국가 차원의 철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에 '변진(弁辰)에서 생산된 철을 중국 군현에 공급한다.
마한, 동예, 왜(倭)도 와서 사간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로 보면 철 생산지인 변진은 신라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선진적 제철 기술이 4세기 이후 신라의 폭풍 성장을 이끈 견인차라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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