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2018.03.28. 11:10
내달18일 경복궁서 ‘왕실문화강좌-칠궁’
1908년 경복궁·청와대 인근에 마련
영조 생모 숙빈최씨·선조때 인빈김씨 등
작고 아담하게…현대로 치면 ‘종묘 별당’
후궁들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다. 왕실의 대를 잇고도 가족이 아닌 것이다. 후궁들은 도화서(圖畵署)에서 공식 초상화도 그려주지 않는다. 같은 임금의 부인인데도 정비인 중전에게 회초리를 맞기도 한다.
그래서 후궁들은 명예를 위해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자신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강한 승부욕과 와신상담의 의지를 본능적으로 품는다.
조선의 후궁은 종2품(차관급) ‘숙의’ 쯤 돼야 힘 좀 쓸 수 있었다. 임금과 ‘원 나잇’만 했다면 종6품 ‘상기’에 그친다. 옷감을 짜고, 왕실의 수발을 드는 8품 벼슬에서 3계급 특진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짧으나마 임금과 사랑을 이어갔다면 정5품 ‘승은상궁’까지는 간다. 종6품은 궁궐 수문장 팀장급, 정5품은 지방소도시의 수장 쯤 된다.
임금의 배우자 반열에 오르는 첫 품계는 종4품(군수급) 숙원이다. 이어 정4품(부이사관급) 소원, 종3품(부처 국장급) 숙용, 정3품(차관보급) 소용, 종2품(차관급) 숙의, 정2품(장관급) 소의 종1품(부총리급) 귀인, 정1품(정승 급) 숙빈 등 빈(嬪)으로 올라간다.
임금을 낳은 후궁은 당대 혹은 후대에 명예를 얻지만, 95%안팎의 후궁은 한때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는 마음만 품은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www.royalpalace.go.kr)가 오는 4월18일~6월20일 매주 수요일 경복궁 집옥재에서 진행하는 ‘왕실문화강좌’에서도 왕을 낳은 일곱 후궁(임금의 어머니인 후궁은 더 많음) 만을 다룰 수 밖에 없다.
4월18일 첫 강좌에 나설 신병주 교수에 따르면, 조선은 최대 9명의 후궁을 둘 수 있었지만 후기 들어서는 후궁을 적게 두고 현종이나 철종처럼 기록상 후궁이 없는 왕들도 나타난다. 전기에는 안순왕후, 제헌왕후, 정현왕후 처럼 후궁에서 정비로 승진하기도 했으나 중기 이후 왕비 간택은 장희빈을 제외하곤 외부 공모에 의해 뽑았다고 한다. 실제 조선 중기 이후 내명부의 암투가 정변, 환국, 사화, 옥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후궁을 적게 두고 중전 승진을 없앴다.
집옥재 강좌가 소개하는 일곱 후궁의 사당을 ‘칠궁(七宮)이라 하는데 모두 경복궁 청와대 주변에 있다. 나인출신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의 후손인 순종이 1908년 후궁들도 궁 근처에 모시자고 해서 모은 것이다. 칠궁은 육상궁(숙빈최씨), 연호궁(사도세자의 형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 선희궁(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저경궁(선조의 후궁으로 정원군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대빈궁(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경우궁(정조의 후궁으로서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덕안궁(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 생모인 엄황귀비)을 통칭한다. 현대식으로 치면 종묘 별당이다. 작게 지었기에 정원이 예쁘다.
낮은 계급의 궁녀 출신 어머니를 가진 영조는 늘 열등감을 가졌는데, 그 만큼 효심은 최고였다. 숙빈묘라는 이름을 육상궁으로 격상시켰고, 재위 52년 동안 247회나 참배했다.
영조의 첫사랑 정빈 이씨는 1694년(숙종 20)에 태어나 8세 때에 궁에 들어왔다. 1721년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자 정빈 이씨도 소훈 첩지를 받았다. 그러나 한 달 남짓 지난 11월 16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정빈이씨가 낳은 효장(시호)은 세자 책봉을 받았으나 역시 사망하면서 나중에 조카인 정조가 진종으로 추증해줬다.“아침에는 나를 대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깊이 숨어서는 말을 않으니, 그날 광경의 비참하고 처절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따뜻한 말과 낭랑한 음성을 어느 날에 다시 들으며, 온화한 모습과 부드러운 얼굴을 어느 때에 다시 본단 말인가.” 영조는 이씨가 죽자 대성통곡하며 제문을 지었다.
인빈 김씨는 선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후궁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피난을 갈 때도 정비 의인왕후 박씨를 제치고 인빈 김씨를 대동할 정도였다.
인빈 김씨는 그러나 후궁때문에 ’옥사‘ 등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했다. 광해군의 어머니인 중전급 자태의 공빈이 일찍 죽자 인빈김씨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 신성군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허위 고변을 일삼은 것으로 기록된다. 송강 정철이 희생양이 되어 관동별곡을 지은 먼 원인이 된다. 김씨는 서인이던 송강의 일로 자연스럽게 동인과 가깝게 지냈지만 기축옥사가 발생하면서 힘을 잃고 만다. 그러나 자신의 손자인 인조를 옹립하며 벌인 쿠데타 성공 덕분에 명예를 회복한다.
궁중 나인 출신 숙빈 최씨는 ‘조선의 신데렐라’이다. 숙종때 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 암투속에서 정권의 대세를 잡아가던 노론계 인현왕후 편에 서면서 영조의 등극 분위기를 만들고 영조 이후 순종 까지 왕실의 어머니가 된다. 생전에는 측은했지만, 죽어서는 최고의 영예를 획득한 것이다.
영조는 아래로는 부인들과 자식들의 애처로운 죽음, 아들 사도세자와의 갈등 등을 겪어야 했다.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친아들 사도세자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남편에게 고변한 것은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근거가 됐다.
이씨의 사당은 의열궁이다. 종사(宗社_를 위해 사도세자 사사를 건의함으로써 ‘義(의)’를 세우고, 국왕인 남편에게 의리를 다하였다는 의미의 ‘열(烈)’을 다했다는 뜻이다. 일부 논객들은 정치적 선택이라기 보다는 아들과 사이가 나빠 자신과도 멀어질 것 같은 영조로부터 측은지심, 연민지정을 받으려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을 하려 한다.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는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간택과정을 거쳤다. 왕실 후사를 잇기 위해 엄선한 것이다. 그러나 아들 순조가 외척의 세도정치에 휘둘리고 국정을 바로하지 못하는 등 국왕으로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그녀의 존재감은 작아질수 밖에 없었다.
고종의 후궁 엄황귀비는 명성황후 민씨가 참혹하게 피살된 이후 죽음의 공포에 떨던 고종을 잘 다독이면서 정치적 힘을 키웠다. 장희빈의 경우, 만약 숙빈최씨의 과장된 고변이 아니었다면, 노론의 집요한 공격을 받지 않고 탕평한 정국속에서 승진한 중전의 역할을 했다면 상남자 숙종을 잘 이끈 ‘연인 같은 정부인’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엄황귀비, 장희빈 얘기는 숱하게 나왔지만, 한희숙 숙대교수와 지두환 국민대교수가 각각 다양하고 입체적인 시각과 감춰진 스토리로 국민들의 귀를 즐겁게 할 것이다.
함영훈 기자/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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