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28] 백제 '최후의 날' 함께한 공산성 갑옷 (조선일보 2018.03.28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갑옷 조각, 공산성, 공주대 박물관.
광장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곳에 큰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유적 대부분이 훼손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굴 조사 때 지하 5~7m 지점에 백제 유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당초 9월까지 조사를 끝낼 예정이었으나 저수 시설 안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발굴을 연장했다. 때마침 공산성에서 백제 문화제 프로그램을 시행해서 며칠간 조사를 중단했다. 행사 마지막 날인 10월 9일 오후 조사를 재개한 이현숙 학예사는 비늘 모양 옻칠갑옷 조각을 발견했다. 그 후 이 학예사는 백제 초유의 옻칠갑옷 조사에 집중했다. 습기를 유지하며 온전한 상태로 노출해야 했기에 숨쉬기도 힘들었다. 10월 11일 오후 2시쯤 저수시설 속에서 홀로 조사를 이어가던 이 학예사는 일순간 깜짝 놀랐다. 대칼로 부드러운 진흙 덩어리를 떼어내자 검은색 갑옷 조각에 유려한 필체로 써내려간 붉은색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행정관십구년(行貞觀十九年)'. 정관은 당나라 연호로, 19년은 645년이며 백제 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다급히 현장으로 달려온 이 관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1980년 이래 공산성에서 숱한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임에도 처음 보는 옻칠갑옷을 마주하고서는 감격했다. 작업은 계속됐고 여러 관청의 이름, 이씨 성을 가진 인명이 쓰여 있는 갑옷 조각을 추가로 찾아냈다. 옻칠 말갑옷, 철제 갑옷 조각 등 수많은 유물도 차례로 출토됐다. 이 관장은 갑옷 출토 맥락을 검토한 뒤 '백제산 갑옷을 의자왕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이 사용하다 패망 시점에 묻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발표한 뒤 갑옷의 주인을 당나라 장수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갑옷 주인이 패망한 백제의 왕족인지, 백제를 패망시킨 당나라 장수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백제 '최후의 날'을 함께한 갑옷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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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29] 신라 '로열패밀리'의 전유물 (조선일보 2018.04.0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24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과 촉탁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동료들과 함께 경주 봉황대 남쪽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는 초가집이 여러 채 들어서 있었는데, 집과 집 사이에 둔덕처럼 솟은 무덤 2기가 조사 대상이었다. 발굴이 끝나고 서편 무덤은 금령총, 동편 무덤은 식리총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6월 4일부터 본격화됐다. 이틀 후 우메하라는 썩어 내려앉은 목관 부재 틈새에서 식리(飾履), 즉 금동 신발을 발견했다. 신발 표면에 정교한 무늬가 가득 조각되어 있음을 확인하곤 이것이 이 무덤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실마리라 여기며 일제히 환호했다. 이어 일사천리로 무덤 내부를 조사했다. 목관 동쪽에 금관이 묻혀 있으리라 판단하고 그곳을 먼저 팠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어진 조사에서도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장식 대도와 화려한 말갖춤이 출토됐다. 출토 유물 가운데 압권은 무덤 이름을 식리총이라 짓게 만든 금동 신발이었다. 신발에 조각된 인면조(人面鳥), 봉황, 연꽃 등 다양한 무늬는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는 듯 유려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이 신발은 평소 신었던 것은 아니고 장례용품으로 특별히 만든 것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 20여 점 가운데 절반 이상은 경주 시내에 있는 왕족 무덤에, 나머지는 신라 지방의 유력자 무덤에 묻혀 있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왜 이토록 화려한 금동 신발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무덤 속으로 가져가려 한 것일까? 신라에서 귀금속 공예품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금동 신발처럼 상징성 강한 의례용품은 더욱 그러했다. 발굴 양상에서 보면 국왕이 하사(下賜)한 금동 신발을 무덤에 가져갈 수 있었던 인물은 매우 적었다. 왕의 직계가족은 당연히 금동 신발을 소유했으나 지방 유력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이 벌어졌고 신라 국왕은 금동 신발을 매개로 권력을 다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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