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4.18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0년 5월 24일, 국립박물관 조사원들은 충남 천안시 청당동 소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1986년 가을, 그곳에서 젖소를 키우던 유태식씨가 청동제 마형대구(馬形帶鉤) 즉, 말 모양 허리띠 버클 등 유물 몇 점을
발견해 신고했다. 이 유물이 마한의 문화를 밝힐 수 있는 단서라 여겨 발굴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첫 발굴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형대구, 청당동5호묘, 국립중앙박물관.
이듬해 8월 12일, 서오선 학예관 등 조사원들은 발굴을 재개하며 유씨의 젖소 방목장을 조사하기로 했다.
막상 조사를 시작하니 어려움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방목장 철조망에 흐르는 전기 때문에 감전되기도 했고 젖소 분변을
직접 치워야 했다. 게다가 연일 혹서가 계속됐다. 권오영, 함순섭 학예사 등은 난관을 뚫으며 무덤의 흔적을 찾아 나갔다.
조사 구역 동남쪽에서 조사를 이어가던 권 학예사는 길이 3.5m, 너비 1.07m인 목곽묘 윤곽을 찾았다.
5호묘라 불리게 되는 이 무덤에서 드디어 기대하던 마형대구 1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노출 작업을 이어가자 마형대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모두 11점이나 출토됐다.
이 무덤에서는 1500여 점의 유리구슬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로마에서 제작된 금박유리구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무덤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덤을 감싸 도는 도랑, 즉 주구(周溝)를 찾아냈다.
마한의 묘제(墓制)인 주구묘(周溝墓)가 처음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경기·충청·전라 지역 곳곳에서 마한 유적이 잇따라 발굴됨에 따라 마한 사람들이 쇠로 만든 무기와 농기구를 소유했고
밀폐된 가마에서 구운 그릇을 썼으며 중국의 한(漢), 심지어 로마 물품까지 수입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반도 중서부에 살던 마한 유력자들 사이에서 마형대구가 크게 유행했고 그 문화가 진한과 변한으로 파급되었음이
밝혀졌다. 청당동 유적 발굴은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마한의 실체를 해명하는 긴 여정의 단초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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