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4.03 김기철 논설위원)
4·3사건 촉발한 폭동은 '항쟁', 국가 공권력 행사는 '탄압' 규정
國立박물관의 모순된 역사관…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하기만
김기철 논설위원
구(舊)소련 시절 유행한 농담 하나.
아르메니아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청취자가 전화를 걸어 물었다.
"미래 예측이 가능한가?" 진행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인류 사회의
과학적 발전법칙을 꿰고 있는 우리는 미래가 어떨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곤 한마디 보탰다. "문제는 과거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위대한 지도자가 순식간에 제국주의 스파이로 몰리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敵)으로 뒤바뀌는 걸 지켜본
소련 사람들에게 역사는 예측 불가능한 불가사의였다.
서양사학자 임지현 교수의 책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멈칫했다.
요즘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문화부 산하 국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지난 주말부터 4·3사건 70주년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 한복판에는 남로당 유격대가 쓴 '무장대의 호소문'이 내걸렸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처음엔 4·3사건 주동자인 남로당의 책임을 묻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전시장을 둘러보니 4·3을 '무장봉기' '무장투쟁'으로 일관되게 기술했다.
미군은 일본군 같은 '점령군'이고, 미 군정(軍政)과 경찰, 서북청년단 탄압에 맞서 제주도민이 '항쟁'하는 구도였다.
남로당이 대한민국을 접수했거나 '인민공화국' 세상이 된 것도 아닌데 국립(國立)박물관에서 이런 전시를 보게 될 줄 몰랐다.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위(委)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시작됐다.
빨치산들은 이날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5·10 선거를 준비하던 경찰과 공무원,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노무현 정부는 폭동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 2만5000~ 3만명이 숨진것으로 추정했다. 피해자가 많았던 것은 토벌대의
강경 진압작전 탓도 있지만 남로당 무장대가 산간지역 주민을 방패 삼아 유격전을 펼친 탓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전시장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폭동을 '봉기' '항쟁'으로 치켜세우고, 이를 막는 국가 공권력 행사는 '탄압'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리기 위해 설립된 이 박물관이 대한민국 정부 탄생을 훼방 놓는 남로당 무장폭동을
떠받드는 이 자기모순(自己矛盾)을 어떻게 봐야 할까.
노무현 정부는 2003년 4·3사건을 재조사해서 보고서를 내고, 대통령이 공식 사과까지 했다.
보고서는 4·3사건을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다.
정당성 있는 두 세력이 힘겨루기하다 제3의 희생자를 낳은 것 같은 설명이다.
4·3폭동을 이끈 남로당 제주도당책 김달삼은 그해 8월 월북해 해주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4·3을 '무장 구국항쟁'으로
소개하며 '북조선 민주개혁을 남조선에서 실시하도록 용감히 싸우자'고 연설했다.
4·3폭동의 목표가 '인민공화국' 수립에 있다는 걸 고백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이번 특별전 제목은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이다.
남로당 중심의 '4·3사관(史觀)'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입시키겠다는 건가.
무엇보다 4·3 피해자인 제주도민들이 '무장봉기'한 전사(戰士), '구국항쟁'에 뛰어든 투사(鬪士)로 기억되길 원할까.
'폭동' '사건'을 넘어 '봉기' '항쟁'으로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4·3' 앞에 현기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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