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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누가 비판 언론을 잠재우려 하는가

바람아님 2018. 4. 23. 08:52

(조선일보 2018.04.23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드루킹 일당 사건'에서 보듯 여론 조작의 主무대는 인터넷
기술적으로 쉽고 방지책도 묘연… 최선책은 언론의 권력 감시뿐
'TV조선 폐지' 청와대 청원은 비판 언론에 재갈 물리는 폭거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민주당원 드루킹(김동원) 일당이 자행한 온라인 여론 조작 사건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온라인 여론 조작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지만, 이번 사건은 대통령 선거라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조직적·체계적으로 이뤄지고 현 권력 핵심 실세가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히

'게이트'라 할 만하다.

누구도 사건의 전개 방향과 파장을 예측할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여론이 곧 권력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지향하는 모든 정치 집단은 여론 조작의 유혹을 느낀다.

최근 들어 그 주무대는 인터넷이다. 하나의 주장이 다른 주장을 올라타고 또 다른 주장이 순식간에 이를 덮는

이 혼돈과 속도전의 공간에 심사(深思)와 숙고(熟考)의 여지는 사실상 없다. 결국 다수 의견은 어떠한가가

무수한 정보와 주장들로부터 가치 있는 사실과 의견을 걸러내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인터넷 여론 조작의 기본 방향은 이 같은 '다수 의견'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전 정부들에서 군경, 정보기관이 이러한 댓글 공작에 동원됐다.

온라인 마케팅 업체, 온라인 컨설턴트, 각종 리서치 회사라는 이름으로 우후죽순 난립해 활동하는

민간 인터넷 여론 조작 업체들은 그 수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드루킹 일당 사건으로 그 일각이 드러났다고 할 것이다.


인터넷 여론 조작은 심각한 범죄이지만 대책이 마땅치 않다.

이러한 조작에 사용되는 반복 작업 자동 실행 프로그램인 '매크로(macro)'는 인터넷에서 누구나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 아이디와 인터넷 주소(IP)를 바꾸면서 댓글을 조작하면 일반 사용자의 행위와 매크로의 조작 행위를

식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법·제도적 대응도 까다롭긴 마찬가지다.

온라인 여론 조작과 합법적 온라인 정치 활동은 말 그대로 백지장 차이다.

댓글 조작을 원천 방지할 수 있는 인터넷 실명제는 2012년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기술적 및 법·제도적 해법이 묘연하고, 정치권이며 검경, 포털 사업자가 문제 해결자는커녕 문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터넷 여론 조작, 특히 정치권력과 결부된 인터넷 여론 조작에 맞서는 방책은 무엇일까?

결국 돌고 돌아 좀 더 철저한 권력 감시와 비판 이외에 뾰족한 묘수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언론 본연의 비판적 역할에 충실한 언론, 그것이 여론 조작에 대한 최선의 답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의 언론 상황에서 이는 점차 쉽지 않은 일이 되고 있다.

종이 신문은 독자 수 감소, 광고 매출 감소로 재정 악화를 겪어 제대로 된 정부 비판 하는 곳을 손에 꼽을 정도고,

지상파 방송 3사 역시 정치권력 코드 인사(人事) 이후 비판적 보도가 눈에 띄게 약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루킹과 여당 실세 김경수 의원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최초 보도한 TV조선에 대한 '종편 허가 취소

청원'이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떴다. "허위, 과장, 날조 보도를 일삼고 국민의 알 권리를 호도"한다는 이유였다.


누가 누구를 호도하는가. TV조선의 특종은 드루킹 일당과 김경수 의원이 주고받은 비밀 메시지에 의거, 이들 간의

관계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 모처럼의 보도다운 보도였다. 혹여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비판하면 된다.

하지만 보도 행위 자체를 문제 삼아 방송 허가 취소 청원을 올리고 이를 정치운동화하려는 움직임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이는 집권 정치 세력에 부담스러운 여론 조작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 자유를 정면 부정하는 폭거에 다름없다.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 언론은 너무도 작고 무력한 존재다. 특히 종편방송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 제도적 취약점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독립적 언론이 설 땅은 없어진다.


최근에 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는 필자에게 짙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신문 폐간 위협에 굴하지 않고 국민의 알 권리와 진실 보도 원칙에 의거, 미 국방부의 월남전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세상에 공개한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과 언론인들 이야기다. 오늘의 미국은 이처럼 위대한 언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언론도 정치권력의 외압(外壓)에 굴하지 않고 비리와 부정을 끝까지 추적 보도하는 근성과 노력을 보여야

진정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어지러운 판도라의 시기, '언론다운 언론'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