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2018.05.19. 03:01
핵탄두 포기-정치수용소 폐쇄 미룬 채 진짜 양보 없는 '장밋빛 언어'만 되풀이
한국 잘 모르는 트럼프 美 대통령에게 한반도 관계 좌지우지하게 권한 준 셈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남한은 이번 회담에서 한반도의 역학관계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명백히 놓쳤다. 판문점 선언은 원칙을 담은 훌륭한 성명서였지만, 보수 인사들이 지적했듯이 구체적인 내용이 충분히 담겨 있지 않고 2007년 10·4공동선언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과를 판명하는 기준이 지난해의 전쟁 분위기라면 판문점 선언은 분명 진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상회담 결과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사실이 다소 실망스럽다. 진보 진영은 10년의 준비 기간이 있었다. 실제로 정상회담은 전적으로 대외정책이 존재하는 이유(raison d‘^etre)라 볼 수 있다. 진보 진영이 보여준 사드 배치 반대,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마지못한 인정, 주한미군에 대한 양면적 태도 등은 대북 지원이 보수 진영의 강경한 입장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하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없었다. 판문점 선언은 지난 남북 공동선언의 장밋빛 언어를 재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핵무기, 미사일, 인권, 평화조약, 제재완화, 경제협력 등과 같은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 세계는 남한 입장에서, 그리고 미국과 일본 입장에서 진정으로 협상 가능한 진짜 양보를 북한이 보여주기를 여전히 기다린다. 지금까지 북한이 제시한 양보는 진지하다고 볼 수 없다. 가짜 양보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한반도에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북한이 큰 대가를 치를 만한 양보는 아니다. 이미 훼손돼 한국판 체르노빌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는 핵실험장을 폐쇄하는 것도 양보라고 보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 및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해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제사회와의 대화에 연이어 응하는 것 또한 양보가 아니다.
핵탄두 포기, 정치범수용소 폐쇄, 핵사찰단에 핵시설 개방 등을 진정한 양보라 부를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아직까지 이런 의제를 꺼내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룬 수준’ 이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주요 문제들은 나중에 해결하겠다며 또다시 뒤로 미뤄졌다. 이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랫동안 난제로 작용해 왔다. 힘든 선택 사항은 미리 제외되었다. 검증은 미해결 상태다. 훌륭한 선언이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하기 위한 명확한 일련의 조치로 해석되기는 어렵다.
관련된 모든 조치는 곧 가시화될 것이라고 온건파는 주장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고, 아마도 실무급 회담을 통해 상세하게 확인 가능한 명백한 조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 정부는 좋은 기회를 놓쳤고 트럼프 정부에 다시 한번 주도권을 내주었다.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는데도 기이하게 판문점 선언은 향후 회담에 대한 틀을 마련하지도 제약을 설정하지도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행됐던 남북 회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본인이 원하는 바대로 자유롭게 협상에 임할 수 있게 됐다.
동맹국들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무시, 특히 남한에 대한 지속적인 불만 표출, 아시아와 미국 간 무역에 대한 오랜 불평, 인종차별 성향 등을 고려했을 때 이는 큰 위험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어떤 협상을 할지 그리고 남한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진보 진영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주장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무지한 리얼리티쇼 출신 대통령이 한반도 관계를 조성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기회를 놓쳤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로버트 켈리 객원논설위원·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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