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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칼럼] '남북'만 잘되면 '경제'는 깽판 쳐도 괜찮은가?

바람아님 2018. 5. 23. 06:47
조선일보 2018.05.22 03:17

北韓이 핵 포기로 내밀 '청구서' 2조달러에 이른다는 추산 나와
제네바 합의 때 속고 나서도 감상적 統一 지상주의 판쳐
신뢰 없이 무작정 퍼주는 건 보수나 左派의 길 될 수 없어

김대중 고문
김대중 고문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5월 28일 인천에서 있었던 정당 연설회에서 "남북 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깽판 쳐도 괜찮다. 나머지는 대강 해도 괜찮다는 말이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을 굳이 왜곡할 생각은 없다. 발언의 방점은 '남북 관계 성공'에 있지 '나머지 깽판'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말한 '나머지'는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일까? 그의 구체적 언급이 없어 추론할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경제일 것이고, 외교·국방, 국민적 갈등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16년이 지난 지금 노 전 대통령의 후계임을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는 남북문제 해결에 올인하고 있다. 다만 '나머지'는 깽판 쳐도 괜찮다고 말을 한 적은 없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문 정부가 남북에 올인하면서 "청년 실업은 최악이고,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거리로 내몰리고, 기업은 협박과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문 정부가 남북문제에 매달리는 동안 경제는 침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침체 국면에서 우리가 '평화'의 대가로 북한에 지불해야 하는 원조는 얼마나 될까? 집권당의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비핵화가 실현되면 남북 경협은 전면화될 것이고 북한에 대한 SOC(사회간접자본) 투자나 관광 투자, 자원 개발 같은 사업 등은 활발히 진행이 되고 우리 경제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깽판은커녕 더 잘 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국제 전문 기관의 계산은 다르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이 영국 유라이즌 캐피털연구소와 공동 분석한 결과는 북한이 핵 포기로 내밀 '청구서'는 2조달러(약 2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도했다. 이 액수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투입한 돈과 그로 야기된 경제 손실을 기초해 산출한 것이라고 했다. 또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지불했던 총비용 1조2000억달러를 참고한 것이라고 했다.

포천지는 이 비용을 북한 비핵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4개국, 즉 한국·미국·중국·일본이 향후 10년간 분담할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매년 한국이 18.3%, 미국이 1.7%, 중국이 1.6%, 일본이 7.3%일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의 경우 국방 예산을 2.4%(2017년 기준)로 보면, 우리가 북한에 지원할 금액은 국방비의 7.6배가 된다는 얘기다. 엊그제 보도된 것을 보면 북한이 시급히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철도 건설 사업에만 무려 158조원이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북한 재건을 위해 국가 예산을 쓰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북한 지원은 한국 그리고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몫으로 돌아오겠지만 국제기구도 북한에 대한 신뢰를 확신할 수 없어 발을 빼면 우리 몫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북핵 제거가 단계적으로 이뤄지게 될 경우 도중에 사태가 어그러져 이미 들어간 돈만 날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때 북한에 속은 경험이 있다. 결국 경수로 건설에 우리 돈만 들어가고 북한의 핵 개발은 계속됐었다. 오늘날 북한을 그때와 다르게 신뢰하게 만들 아무것도 없다. 당시 북한은 실질적인 '핵 보유국'이 아니었고 지금은 당당히 '핵 보유국'임을 내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감상적 통일 지상주의가 있다. 통일만 되면, 아니 남북만 잘되면 무엇이든 이뤄질 수 있고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다는, 맹목적 '통일=평화'의 등식(等式)이 있다. 그것도 통일이 되고 우리 민족이 잘살게 되는 결과를 확인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북한의 지도층이 성실히 거짓 없이 우리와 같은 심정으로 남북을 대한다는 확신이 없다. 지금 남북문제가 막판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북한을 믿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북쪽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이 보수 언론이고, '평화 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보수 언론이고, 평화의 길에 '머뭇머뭇하고 있는 것'이 보수 언론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신뢰의 역사가 없는 미답의 길에 덮어놓고 놀아나 수백조원을 쏟아붓는 것은 보수의 길도, 진보·좌파의 길도 아니다. 이 길이 아무리 평화로 가는 길이라 해도 우리의 뼛골이 빠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라면 머뭇거리는 것이 정상이다. 만일 노 전 대통령이 일자리·먹거리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오늘의 청년들에게 '경제는 깽판 쳐도 좋으니 남북문제에 올인하자'고 한다면 우리의 청년과 국민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