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5.3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수막새, 화곡리 유적, 성림문화재연구원.
2005년 5월 6일, 박광열 실장과 최상태 연구원 등 성림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은 경주 내남면 화곡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화곡저수지 확장 공사로 수몰 예정인 곳에서 여러 점의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지는 저수지 주변 경작지와 계곡이었다.
그러한 지형에 대규모 유적이 분포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한 주가 지나지 않아 예상은 빗나갔다.
구름·꽃·새 등 다양한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토기와 함께 연꽃무늬 수막새, 사슴이 조각된 전돌 등 고급스러운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유물은 조사 구역 전면에 켜켜이 깔려 있었다.
20년 이상 신라 유적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임에도 박 실장은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사가 진전되면서 유적 성격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6세기에 시작해 9세기까지 운영했던 신라의 관영 요업(窯業) 단지였던 것이다.
조사원들은 통일 신라 토제품의 생산지를 찾고 싶다는 해묵은 과제를 풀었다는 심경으로 감개무량했다.
조사단은 회의를 열어 유적 대부분은 복토 후 원상 보존하고 일부 지점만을 선정해 발굴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듬해 6월부터 10개월간 진행한 정밀 발굴에서
각종 요업 도구와 함께 공방터, 가마터, 불량품 폐기장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출토 유물 가운데 대다수는 계곡을 가득 메운 토기 조각이었다.
애써 만들었으나 원하는 대로 구워지지 않아 버려진 것들이었다.
화곡리의 장인들은 시대적 미감(美感)을 반영해 물품의 모양이나 무늬를 구상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창출한 기술이나 양식은 왕경(王京)뿐만 아니라 신라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근래의 가마터 발굴 성과를 보면, 그들은 신라 영역으로 새로이 편입된 고구려나 백제의 옛 땅으로도 옮겨가
요업에 종사해서 신라 전체의 문화적 동질성 진전에 일조했다.
출토 유물을 통해서 장인들도 실질적인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人文,社會科學 > 歷史·文化遺産'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백두산정계비와 '잃어버린 땅' 간도 (0) | 2018.06.11 |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35] '임나일본부說' 무너뜨린 고분 (0) | 2018.06.06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33] 봉인 풀린 '웅진 천도'의 비밀 (0) | 2018.05.16 |
99세에 쿠데타 일으킨 고구려의 ‘명림답부’ 아시나요 (0) | 2018.05.13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32] 산꼭대기에 묻힌 신라 最古 철갑옷 (0) | 2018.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