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35] '임나일본부說' 무너뜨린 고분

바람아님 2018. 6. 6. 08:26

(조선일보 2018.06.06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85년 7월 말, 조영제 교수와 박승규·김정례 연구원 등 경상대박물관 조사팀은 황강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 나섰다.

황강 하류에 해당하는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마을에 이르렀을 때 강을 향해 돌출된 능선 하나가 일행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숲을 헤치며 능선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도굴꾼에 의해 쑥대밭이 된 가야 고분군이 있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 도굴꾼이 흘리고 간 금동투구 조각, 철갑옷 조각, 가야토기가 흩어져 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분노했지만 유적 성격을 파악하고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 것이 시급했다.

도굴 사실을 관계 기관에 통지하는 한편, 대학을 설득해 발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했다.


유리잔, 옥전M1호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잔, 옥전M1호분, 국립중앙박물관.


11월 25일, '성산리 가야 폐고분' 발굴이 시작됐다.

조사 대상으로 삼은 660㎡(약 200평)에 15기 정도의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으나 막상 발굴을 시작하니

훨씬 더 많은 무덤이 중복된 채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석곽묘·옹관묘 등 무려 50기나 됐고 황금장신구,

철갑옷과 마구, 장식대도 등 당대 최고급 유물 760점이 쏟아졌다.


1차 발굴 후 조사단은 이 유적을 옥전고분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고 1992년까지 5차에 걸쳐 조사를 이어갔다.

그 사이 조사된 무덤은 111기, 출토 유물은 2000여 점으로 늘었다.

특히 M1호분에서는 동로마산 유리그릇이, M3호분에서는 용봉문대도(龍鳳紋大刀) 4자루가 출토되어

고분군의 높은 위상을 잘 보여주었다. 조 교수는 이 고분군을 다라(多羅) 왕족 묘역으로 특정했다.


다라(多羅)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근거로 활용된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에 왜(倭)가 평정했다고 기록된

가야 7국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다라 핵심 유적에선 왜의 문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가야적 색채가 완연한 유물이

주로 출토됐다. 옥전고분군은 국명 하나 겨우 남기고 사라진 다라를 멸망 1400여 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다.

또 '다라(多羅)는 결코 왜에 평정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