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6.2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7년 12월 7일, 이남석 관장과 이훈·서정석 연구원 등 공주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은 충남 천안시 용원리 소재 야트막한
능선 위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천안시가 독립기념관 남쪽에 조성하려던 관광단지 부지에서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흑유자기, 용원리 9호 석곽묘,
국립공주박물관.
첫날부터 무덤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됐고
최종 발굴된 무덤은 152기에 달했다. 도굴되지
않은 4~5세기 백제의 무덤이었다.
몇 기씩 발굴되던 이 시기의 무덤이 군집을
이루며 확인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금귀걸이, 용봉문대도, 마구, 무기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조사원들이 주목한 것은 1호 석곽묘 출토
환두대도였다. 용과 봉황 무늬가 조각된
이 대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정교한 대도로
평가받는 무령왕릉 출토품보다 100년이나
오래된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던
용봉문대도 '중국왕조 하사설'을 뒤집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듬해 4월 말, 발굴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점에
이르러 무덤 밀집 구역에서 남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능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굴 때
그곳에서 석곽묘 1기의 흔적이 확인됐다.
이 무덤은 길이가 7.6m, 너비가 4.9m에 달했다.
9호 석곽묘라 이름 붙인 이 무덤에서는 금동관, 금귀걸이, 금동제 화살통과 함께 흑유자기가 출토됐다.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닭 머리처럼 생긴 이 주자(注子)는 4세기 후반 중국 동진에서 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성기 백제 유적에서는 100여 점의 중국 자기(瓷器)가 출토됐다.
왕도에 집중되지만 용원리 9호 석곽묘의 사례처럼 지방 유력자의 무덤에서도 종종 출토된다.
같은 시기의 신라와 가야 유적에서는 각각 1점씩밖에 출토되지 않아 대조적이다.
학계에서는 백제 지배층이 '명품 자기'가 자신들의 지위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 앞다투어 입수하려 노력했고,
백제 왕실은 그러한 풍조를 십분 활용해 지배력을 강화해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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