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9.1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08년 12월 26일, 동신대 문화박물관 이정호 교수와 이수진·홍민영 연구원 등은 전남 해남 옥천면 성산리에서
만의총(萬義塚) 1호분 발굴을 시작했다. 이 무덤은 정유재란 때 왜군과 전투하다 순절한 의병들을 합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실시한 시굴 조사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있었기에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확인해볼 참이었다.
수많은 의병이 묻혔다면 봉분에서 유골이 여럿 나올 가능성이 있어 조사원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흙을 걷어나갔다.
80㎝가량 내려간 곳에서 검은색을 띤 토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굴 때 이 층에서 흙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인(phosphorus)
성분이 많이 나와서 더욱 주의를 기울였으나 유골은 남아 있지 않았다.
토우 장식 서수형 토기, 만의총 1호분, 동신대 문화박물관.
아래로 더 파 내려가자 정연한 석곽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굴 때 조사원들을 놀라게 한 '예상치 못한 발견'이 바로 이것이다.
뚜껑 돌을 제거하자 인골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백제 웅진 시기의 유물이 쏟아졌다.
백제 도성에서 만든 귀금속 장신구와 함께 가야 토기, 왜에서 반입한 청동 거울 등이 포함돼 있었다.
만의총 1호분의 원주인은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토기 한 점이었다.
이 토기에는 용처럼 생긴 상상의 동물과 그 동물 등에 올라탄 남성이 조각되어 있었다.
원래 주자(注子)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구가 따로 달려 있지 않고 구멍만 뚫려 있었다.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옮기는 모습을 나타낸 듯하다.
이 교수는 만의총 1호분을 '국제 교역에 종사한 백제인의 무덤을 정유재란 때 다시 활용한 복합 유적'이라 평가했다.
어찌 보면 남의 무덤을 파 다시 무덤을 쓴 것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둘 사이에는 900여 년이란 시차가 있다.
봉분이 무너져 무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재차 무덤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 후 주민들의 정성스러운 관리 덕분에 백제 무덤은 도굴당하지 않은 채 원래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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