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9.12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은제 관식(측면), 육곡리 7호분, 국립공주박물관
1986년 6월 13일, 안승주 관장과 이남석 학예사 등 공주사대박물관
조사원들은 충남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에서 한 달 예정으로 백제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왕도인 공주·부여와 달리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지방의 고분 문화를 밝혀 볼 셈이었다.
이 학예사는 도굴로 파괴된 1호분을 조사한 다음,
또 다른 고분을 찾아 나섰다.
1호분 서쪽으로 약 45m 떨어진 곳에서 지형이 조금 봉긋한 부분을
발견하곤 무덤일 것으로 생각하고 파보았다. 예상대로 석실이 있었다.
2호분이라 이름 붙인 이 무덤에서는 금동 귀걸이와 함께 다량의 토기가
출토됐다. 뚜껑접시(蓋杯) 1점에는 계란껍데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당초 모든 고분이 도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2호분 발굴을 계기로
'중요한 발견'에 대한 희망이 생겨났다. 희망은 곧 현실이 됐다.
1호분 동쪽에서 찾은 무덤 가운데 7호분은 큼지막한 판석(板石)을
조립해 만든 석실분으로, 석실 단면이 육각형을 띠는 등 부여 능산리의
백제 왕족묘와 흡사했다.
석실 입구를 처음 열었을 때 어두컴컴한 바닥에 무엇인가 잔뜩 깔려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며 자세히 살피니 머리를 북쪽으로 둔 채 묻힌 성인 세 사람의
인골이었다. 그중 석실 서벽 쪽 인골의 두개골 주변에는 경험 많은
고고학자들도 좀체 발견하기 힘든 특별한 유물 1점이 놓여 있었다.
길이 18cm에 5개의 꽃봉오리 모양 장식을 갖춘 은제품이었다.
이 학예사는 이 유물을 '삼국사기' 등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의 나솔(奈率) 이상 관료들이 관에 꽂았던 은꽃(銀花)' 실물로
해석하면서 소유자를 7세기 무렵 세상을 뜬 백제의 고위 관료라 추정했다.
나주 흥덕리, 남원 척문리, 부여 하황리에 이어 네 번째로 발굴된 것이지만
학술조사를 통해 출토 맥락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첫 사례였다.
은제 관식은 그 후로도 간간이 출토되어 현재는 13점을 헤아리며,
백제 관료들의 복식 연구와 복원에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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