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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 받던 젊은 인재 임사홍, 어떻게 희대의 간신 됐나

바람아님 2018. 9. 3. 09:36

[중앙일보] 2018.09.02 08:00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15)
지금까지 주로 인생 후반전에 더욱 빛났던 인물들을 다뤘다. 새로운 도전에 성공했거나 오랜 기다림 끝에 꿈을 이룬 사람, 개과천선하고 크게 성장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하지만 모든 후반전이 아름다울 수 없는 법이다. 전반전보다 안 풀릴 수도, 별 볼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 심지어 후반 들어 심하게 타락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임사홍이 여기에 해당한다.
 
영화 '간신'에서 임사홍 역을 맡은 배우 천호진. 영화 '간신'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상 최악의 간신 임사홍, 임숭재 부자를 다룬 영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간신'에서 임사홍 역을 맡은 배우 천호진. 영화 '간신'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상 최악의 간신 임사홍, 임숭재 부자를 다룬 영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임사홍(1449~1506년)은 처음부터 간악한 인물은 아니었다. 유생의 신분으로 세조 앞에서 경전을 강론했을 정도로 총명함을 인정받았다. 인품과 능력이 뛰어나다며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됐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 최항도 훌륭한 젊은 인재라며 그를 왕에게 추천한 바 있다.
 
‘흙비는 자연현상’ 주장 펴다 삭탈관직당해
그런데 1478년(성종 9년) 사건이 터진다. 이때 대간에서는 흙비가 내렸다며 임금에게 술을 먹지 말고 활쏘기를 그만두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에서 임금을 꾸짖은 것이므로 일체의 유흥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임사홍은 흙비는 자연현상에 불과하다며 임금이 자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임사홍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쏟아졌다. 임사홍이 감히 하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금을 망치려 든다는 것이다.
 
임사홍에 대한 공격은 매서웠다. 역적으로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사실 과도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왕실의 인척이자 성종의 총애를 받는 임사홍을 제압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더욱이 그즈음 임사홍은 아들 임광재를 예종의 딸 현숙 공주와 혼인시키면서 막강한 배경을 얻은 상태였다. 신하들로서는 권신이 될지도 모를 싹을 아예 뽑아버리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임사홍은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이는 아들 숭재를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시키면서 더욱 커졌다. 사진은 영화 '간신'에서 임숭재(좌)와 임사홍(우) 부자.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임사홍은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이는 아들 숭재를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시키면서 더욱 커졌다. 사진은 영화 '간신'에서 임숭재(좌)와 임사홍(우) 부자.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결국 임사홍은 삭탈관직 되어 평안도 의주로 유배를 떠났고 8년이 지나서야 사면됐다. 그러나 유배가 풀린 뒤에도 오랫동안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를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파란을 겪으면서 임사홍은 복수심을 키웠던 것 같다. 정치적 파산상태가 가져다준 결핍과 불안은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낳았고,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왜곡된 의지를 키웠다. 이는 1491년(성종 22년) 아들 숭재를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시키면서 더욱 커졌다.
 
그러던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임사홍은 재기할 기회를 얻는다. 며느리 휘숙옹주가 연산군이 가장 총애한 여동생이었던 데다가, 연산군의 친모 윤씨가 폐위될 때 임사홍이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한 바 있기 때문이다. 임사홍은 왕의 뜻을 짐작하고 조정을 위협하는 술책을 아뢰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숭품(崇品, 종1품)에 발탁하고 수시로 불러 접견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에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연산군 비판 시 지은 자기 아들 엄벌할 것을 요구
임사홍은 전국의 미녀를 징발하는 등 연산군의 폭정에 충실하게 부역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임사홍은 전국의 미녀를 징발하는 등 연산군의 폭정에 충실하게 부역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이후 임사홍은 전국의 미녀를 징발하는 등 연산군의 폭정에 충실하게 부역했다. 임금을 나쁜 길로 이끌었으며, 사리사욕을 채우고 권력을 남용했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며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자,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아들 임희재가 죽는 것도 방임한다. 임희재는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는데, 자신의 안전에 누가 될까 봐 걱정한 임사홍은 아들을 엄벌해달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임희재가 죽은 날 잔치를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체 임사홍은 왜 이렇게 타락해버렸을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임사홍은 그러질 못하고 ‘어떻게든 권력을 얻어 저들에게 복수해야지’, ‘이 권력을 놓쳤다가는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몰라’하는 과도한 집착에 점점 더 악인이 되어갔다.
 
만약 그가 고난의 시간을 실력을 쌓고 인격을 도야하는 계기로 삼았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후반전은 전혀 다르지 않았을까.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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