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 [484] 지족보신 (知足保身)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다 저녁때가 되면 어슬렁거리며 나가 밤중에 돌아왔다. 손에는 어김없이 다섯 되의 쌀이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난 쌀이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흰 쌀밥 먹고 좋은 옷 입으며 온 식구가 잘 살았다. 막상 집안을 들여다보면 세간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늙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을 불렀다. "내 말을 잘 듣거라. 집 뒤 나라의 곳간 몇 번째 기둥 아래 집게손가락만 한 작은 구멍이 있다. 그 안쪽에는 쌀이 가득 쌓여 있다. 너는 손가락 굵기의 막대로 그 구멍을 후벼 파서 쌀을 하루 다섯 되만 꺼내 오너라. 더 가져오면 안 된다." 이 말을 남기고 백성은 세상을 떴다. 아들이 아버지의 분부대로 해서 이들은 전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차츰 갑갑증이 났다. 끌로 파서 구멍을 더 키웠다. 하루에 몇 말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이 없자 신이 나서 구멍을 더 키웠다. 결국 창고지기에게 발각되어 붙들려 죽었다. 권필(權韠·1569~1612)의 '창맹설(倉氓說)'에 나오는 얘기다. 권필은 이야기 끝에 이렇게 썼다. "구멍을 뚫는 것은 소인의 악행이다. 하지만 진실로 만족할 줄 알았다면 몸을 지킬 수 있었으니, 백성이 그러하다. 되나 말은 이익이 작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족할 줄 모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 아들의 경우가 그렇다. 하물며 군자이면서 족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겠는가? 하물며 천하의 큰 이익을 취하면서도 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라면 어떻겠는가?" 1년에 500억원을 벌었다는 중국 여배우는 세금을 안 내려다 당국에 감금되었다 하고, 쌍둥이 딸의 동시 전교 1등은 실력이라고만 믿기엔 욕심이 너무 과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족함을 알았던 창고 도둑은 평생을 탈 없이 살았지만, 만족을 몰랐던 그 아들은 쌀 몇 말 더 훔치려다 목숨과 바꿨다. 바른 일을 하면서 족함을 아는 경우와, 악한 짓을 하면서 족함을 모르는 경우와 견주면 어떠한가? |
[정민의 世說新語] [485] 봉인유구 (逢人有求)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한 말이다. 왕궁의 음탕이나 붙잡혀간 소설가, 월남 파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 내면서,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주인에게 옹졸하게 분개하고, 20원을 받으러 서너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 자신의 지질함을 경멸했다. 그러면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하고 자조했다. '부탁'에서는 "자라나는 죽순(竹筍) 모양으로 부탁만이 늘어간다. 귀찮은 부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갖다 주는 것으로 연명을 하고 보니 거절할 수도 없는"이라고 했고, "완전히 무시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부끄러움이 없는" 처지를 연민했다. 송나라 여승경(呂升卿)이 말했다. "부끄러움에는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있고, 참아서는 안 될 것이 있다 (恥有當忍者, 有不當忍者)." 참아야만 할 것과 참아서는 안 될 것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참아서는 안 될 모욕은 견디면서, 참아야만 할 사소한 일 앞에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발산한다. 맹자가 말했다. "사람이 부끄러움이 있으면 능히 하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안빈(安貧)하지 못한다. 그 기운이 조금만 꺾이면 두 다리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만다. 염치를 모르니 또한 못하는 짓이 없다 (人有恥則能有所不爲. 今有一樣人, 不能安貧, 其氣銷屈, 以至立腳不住. 不知廉恥, 亦何所不至)." 여사인(呂舍人)이 말한다. "사람만 만나면 요구를 하니, 그래서 온갖 일이 어긋난다네(逢人卽有求, 所以百事非)." 만나는 사람마다 굽신대며 도와달라 한다. 그 비루한 꼴을 보고 도와줄 일에도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래서 인생이 더 꼬인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온다. 부끄러움은 나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방패막이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작은 시련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를 허물고, 자폭한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나는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이 '거미'에서 한 말이다. 무너져 가는 인간의 품격을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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