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10.21. 00:59
정부가 2020년부터 발급할 차세대 전자여권(일반용)의 표지를 녹색에서 남색(진청색)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1988년 여행자유화 시행 때부터 사용된 녹색 표지가 32년 만에 사라지는 것이죠. 사실 그동안 녹색 표지가 한국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간간이 있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초록색 여권을 사용하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가 대다수’라며 표지를 파란색으로 변경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등장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여권 표지를 남색으로 바꾸기로 하자 이번엔 또 다른 논란이 제기됩니다. 남색으로 바꾼 새 여권 시안이 현행 북한 여권과 비슷하다는 거죠. 실제로 남색 바탕에 금색 글씨가 얼핏 보면 유사성을 주기도 합니다.
현재 패스포트 인덱스에 올라와 있는 여권은 모두 199종. 이중 파란색 계열을 쓰는 국가가 가장 많은 78개국입니다. 붉은색 68개국, 초록색 43개국, 검은색 10개국입니다. 현재 한국은 초록색 계열로 분류돼 있지만 2020년엔 미국, 캐나다, 브라질, 호주, 파나마, 북한과 같이 파란색 계열로 바뀌겠지요.
한국에 앞서 내년에 또 한 나라가 파란색 표지를 도입합니다. 지금 한창 유럽연합(EU)과 ‘이혼 협상’, 즉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진행 중인 영국입니다. 테리사 메이 총리는 2017년 12월 “자랑스러운 시민권을 상징하는 독립과 주권의 표현”이라면서 2019년 10월부터 영국 여권 표지를 진청색으로 바꾼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유럽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기로 했으니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장인 겁니다. 물론 일각에선 “브렉시트로 인한 또 다른 돈 낭비”라는 불만도 없지 않습니다. 브렉시트 자체에 대한 불만, 즉 새 여권과 함께 할 이동의 불편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마음도 반영됐겠지요. 게다가 브렉시트 시행(2019년 3월 29일)과 새 여권 도입(10월) 간 시간차로 인해 이 사이에 여권을 발급받는 이들은 버건디 색상에 EU 마크가 없는, 어정쩡한 여권을 받게 되는데요, 영국 인디펜던트는 이 수요가 400만건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EU 여권에서 보듯, 지정학적으로 유사한 카테고리 국가들은 여권 색깔에서 일정한 유사성을 보입니다. 때문에 여권 표지 색상이 정체성을 담아내는 걸로 읽히기도 합니다. 예컨대 터키가 2010년 붉은색 여권을 도입한 데엔 “EU 가입을 염원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붙었습니다. 그렇다고 EU 규정에 회원국 여권 색깔과 관련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닙니다.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여전히 검정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 여권을 사용 중입니다.
한국 여권의 녹색 표지가 국가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녹색이 ‘이슬람’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적인데요 사우디는 여권은 물론 국기 색깔도 녹색입니다. ‘이슬람=녹색’인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정복 전쟁에 나설 때마다 녹색 깃발을 들었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중동 사막의 유목민 사이에서 녹색이 자연과 생명, 신의 땅을 상징해온 역사도 반영됐겠지요. 중동은 아니지만 아시아권의 대표적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 등도 녹색 여권을 씁니다.
한국의 이번 여권 변경에는 속지도 포함됩니다. 남대문과 다보탑으로 통일된 사증면에 각 시대 별 대표적 유물을 배치해 페이지마다 다른 디자인을 볼 수 있게 한다는 방침입니다. 반구대 암각화, 신라 금관총 금관, 고려청자, 훈민정음(언해본) 등 다채롭습니다.
이렇게 다채로운 디자인을 하는 이유는 미학적 측면뿐 아니라 실용적 측면도 있습니다. 디자인이 복잡하고 다양할수록 위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한국이 이번에 사증면에 각각 다른 유물을 넣는 것도 이런 보안 강화 차원도 있습니다. 더불어 종이로 되어있던 신원정보면도 내구성이 강한 폴리카보네이트로 변경됩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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