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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에게 시대를 묻다] (18) 목민심서 '이전' 편 '속리' 공무원 숫자가 줄어야 백성이 편안하다

바람아님 2018. 11. 13. 07:32
매경이코노미 2018.11.12. 09:33

102만6201명. 한국의 공무원 숫자

다(2017년 기준).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를 포함한 공무원 수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공무원 3만6000명(국가직+지방직)을 증원하는 계획을 내놨다. 1990년(3만6775명) 이후 최대 규모다.

공무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공무원이 많다고 과연 좋은 나라일까.


다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당시 고위 공무원이었던 목민관은 하급 공무원인 아전이 문제를 일으키면 처음에는 관대하게 타이르기도 하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면 남은 수단은 법밖에 없다. 간악한 아전이 백성을 괴롭히고 착취하면 형벌만이 유일한 법이다. 다산은 아전이 많을수록 나라에 해가 되고 백성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아전의 수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민관 최대 임무는

▷간악한 아전을 다스리는 일

다산은 간악한 아전이 많다고 늘 우려했다. 유독 전라도 아전이 심했다는 것이 다산의 판단이다. 매천 황현 또한 조선의 3대 병폐 중 하나로 전라도 아전을 꼽았다. 목민심서를 보면 전라도 아전이 얼마나 백성을 괴롭혔는지 잘 나타난다.

“판서 이노익(李魯益, 1767∼1821년)이 전라 감사가 됐다. 전라 감영 아전 최치봉(崔致鳳)이란 사람은 간활하고 악독한 아전들의 괴수였다. 전라도 53읍에 읍마다 반드시 2~3명 간활한 아전이 있어 모두가 최치봉과 결탁해 믿고 맹주(盟主)로 삼아 지냈다. 최치봉이 해마다 돈 수십만냥을 각 읍의 간활한 아전에게 나눠줘 창고의 곡식을 환롱(幻弄·꾀를 부려 농락함)해 팔아 돈으로 바꾸고 고리대(高利貸) 밑천으로 삼으니, 만민이 그 해독을 입었다.”


최치봉의 만행은 더욱 심해져 목민관은 물론 감사까지도 최치봉을 단속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더구나 최치봉은 중앙 재상과 결탁해 아무도 그의 비행을 폭로해 처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노익 감사는 달랐다. 그는 최치봉의 비행 사실을 열거하면서 53개 고을 아전의 ‘괴수’인 최치봉을 사형에 처했다. 여담이지만 최치봉을 처단했음에도 전라도 아전의 병폐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해 결국 동학혁명으로 연결됐다는 점은 역사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다산은 “아전 중 악독하고 간활한 자의 우두머리는 모름지기 행정관청 밖에 비(碑)를 세우고 이름을 새겨 다시는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탐관오리의 비행을 기록한 비를 세워서 만인에게 공개하고 재발하지 못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른바 ‘기악비(記惡碑)’라는 것으로 죄인의 이름을 비에 새겨 범죄 재발을 막자는 뜻이었다.

또 다산은 아전의 잘못은 그 근본 원인이 목민관에게 있음을 잊지 않았다.


“목민관이 좋아하는 것에 아전들이 영합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내가 재물을 좋아함을 알면 반드시 이로움으로써 꾀어낼 것이요, 한 번 꾐에 넘어간다면 곧 그들과 함께 빠지고 만다.”

재물의 유혹에 빠지면 결국 목민관도 아전의 농간에 넘어가고 만다. 다산은 목민관 약점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아전들의 꾐에 빠지지 않으려면 목민관 스스로 그런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요즘에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목민관이 실무에 능해야

▷아전 농간으로부터 자유로워

다산은 아전을 단속하는 요령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목민관이 돼 중앙에서 내려온 사람은 그저 문과에 급제했거나 벌열집안(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의 후손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 행정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목민관이 하루아침에 천리나 먼 시골에 내려오면 고을의 세부적인 사항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실무를 아는 것처럼 거리낌없이 결재만 해주다 보면 목민관의 능력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 순간 아전은 농간을 부릴 수 있다.


시부(詩賦)나 읊고 경전(經傳)이나 외워 급제한 뒤 목민관이 되면 노련한 아전들에게 물어서 실무를 배울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다가는 반드시 아전에게 당한다고 다산은 강조했다.

“무릇 한 가지 명령, 한 가지 지시를 내릴 때에도 마땅히 수리(首吏)와 해당 아전에게 그 일의 근본을 캐어보고 지엽을 밝혀내야 한다. 밑바닥까지 궁구(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함)해 스스로 마음이 환해진 뒤에 결재한다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무에 밝아져 통하지 않을 것이 없다.”

사건의 전말과 일의 실체를 파악하는 실무를 익힌 다음 공무를 처리하고 서류를 결재하라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다.

다산은 자신이 경험했던 일 하나를 소개했다.


“내가 오랫동안 읍내(귀양살이 기간 강진 읍내에서 거주)에 살면서 들어보니 새로 부임한 목민관이 까다롭게 사건의 근본을 캐어묻는 경우에는 노회한 아전들이 의논하기를 ‘그 징조가 고달플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응대하기를 물 흐르듯 쉽사리 하는 경우에는 서로 웃으면서 ‘그 징조를 알 만하다’고 말하니 아전을 단속하는 요체가 진실로 여기에 있다.”

아전이 중앙 세력과 결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다산은 이런 아전에 대해 세 종류를 언급했다.


우선 ‘적교(謫交)’다. 중앙 관료가 귀양살이 왔을 때 온갖 편의를 제공해준 뒤 그가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연결을 맺어 위세를 부리는 관계다. 궁교(宮交)처럼 궁중 재산인 궁방전(宮房田)을 관리하면서 고관과 연결되기도 한다. 유교(由交)는 전임 목민관과 관계를 잘 유지하다 뒤에 그가 고관이나 재상이 되면 이를 활용해 위세를 부리게 되는 관계를 말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아전들은 중앙 고관과 결탁해 지방 목민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행을 제멋대로 저질렀다. 이들을 다스리지 못하면 고을 행정을 제대로 펼치기 어렵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아전을 단속하는 문제 중 하나로 다산은 고을에 따라 아전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염려했다. 중앙 법제를 개편해 적정 숫자로 아전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치 오늘날 공무원 숫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비슷하다. 과거에는 지금만큼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무원이 필요했다. 이를 감안해도 고을 인구나 재정과 비교해 공무원 숫자가 많은 것은 큰 폐단 중 하나였다.


다산은 “아전 인원수가 적으면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이 적어 백성을 침학하고 가렴하는 일이 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중앙관청에는 정해진 아전의 숫자가 있어서 크게 문제 되지 않으나, 지방의 여러 고을에는 정원이 없어 어떤 경우 수백 명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경상도 안동이나 전라도 나주에는 수백 명 아전이 있어 이들을 모두 단속하기 어려웠다. 그런 사실이 문제임을 알고 숫자를 줄여서 정원을 정하자는 주장이 계속 이어졌으나 나라는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다산은 아전을 단속하는 방법 중 하나로 숫자를 줄이고 이들에게 일정한 봉급을 지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만 해도 아전에게는 녹봉이 일정하게 지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전은 백성을 착취해 자기 배를 불려왔다. 다만 아전에게 녹봉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도 아전에게는 녹봉이 없었으며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다산은 갑자기 녹봉을 주는 것보다 토지제도 개편이 이뤄진 후 녹봉 지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오늘날도 비슷한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아전과 같은 하급 공무원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면 훌륭한 목민관이 되기 어렵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는 당연히 공무원 숫자도 그만큼 필요가 덜하다. 전산화된 환경에서 공무원이 많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조선시대 아전처럼 지금도 말단 공무원 숫자가 많을수록 일반 시민의 삶은 어려워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82호 (2018.11.07~11.13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