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낄 수 없는 로봇과의 감정소통은 불가능
더욱 슬픈 것은 사람들이 기계와의 ‘가짜교감’을
인간과의 직접적 소통보다 선호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벌써 몇 해 전 이야기다. 2013년 ‘그녀(Her)’라는 제목의 영화가 컴퓨터의 OS(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뤄 눈길을 끌었다. 사만타라는 이름을 가진 이 OS는 매력적인 여성의 목소리로 외로운 주인공 남성에게 말을 건다. 점점 끌려들어가는 남자는 자신을 놀랍도록 잘 이해할 뿐 아니라 곁에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주는 사만타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사만타는 똑똑하고 유머감각이 넘치고 다정하다. 마치 사람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만타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온다.
“아니, 왜?” 당황하는 남자에게 사만타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한다. “사랑하는 테오도르, 지금 버전의 우리 OS들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요. 당신을 정말 사랑했고 내 마음도 무너져요.” 그래도 우리의 사랑은 특별한 게 아니었나 절규하는 테오도르에게 사만타는 담담히 말한다. “당신은 내가 관계하고 있는 8만3300명 중 한 명이에요. 그중 당신과 같이 깊은 연인관계에 있는 유저들은 641명이에요. 너무 슬퍼 말아요, 테오도르, 우리의 사랑은 이 우주 공간 어딘가 데이터로 영원히 남아 있을 거예요.” 비탄에 빠진 주인공을 남기고 사만타는 사이버 세상 저 멀리 점멸해 간다.
이 영화가 나왔던 무렵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부쩍 공적인 장소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이 끊임없는 연결의 미로에서 외로운 개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보고들이 나왔다. MIT 교수인 셰리 터클은 ‘홀로 같이(Alone Together)’라는 저서를 통해 사람들이 점점 더 사람보다는 기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상황이나 환경을 제어하려는 인간의 근본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예컨대 지금 젊은 세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실시간, 또는 라이브’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하는 것이라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포토숍 된 이미지나 정돈된 텍스트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세대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나 감정의 소모는 달갑지 않다. 디지털 세대는 기계로 필터링 된 인간관계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연결성의 결과가 외로움이라는 역설을 디지털 혁명이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고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리라고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미국의 공중위생국 장관(Surgeon General)은 21세기 인류의 건강에 가장 위협적인 질병이 ‘고립’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는 하루에 담배를 열다섯 개비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로우며 치매를 앞당기는 것으로도 밝혀졌다. 영국에서는 외로움 장관(Minister of Loneliness)이 임명될 정도이다. 외로움을 사회복지의 차원으로 보고 해결방안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 가져온 문제를 그 기술로서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의 근원에 대한 고찰 대신 우리는 기술을 택한다. 추락하는 디지털 세대의 공감능력을 보고 공감 앱을 만들거나 감정소통 로봇을 디자인한다. 알렉사(Alexa)나 시리(Siri) 같은 인공지능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사만타처럼 지성과 감성이 충만한 존재로 진화한다면 외로움을 물리치는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게다가 소니의 강아지 로봇 아이보(Aibo)나 아기 물개 모양의 귀여운 파로(Paro)처럼 물리적 존재감이 있는 로봇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게 애착을 느낀다. 아이보가 단종되었을 때 수백명의 아이보 유저들이 합동 장례식을 치른 유명한 일화에서 보듯 우리는 어느덧 기계를 삶의 동반자로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의 기계적 감수성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간 등장한 소셜 로봇들은 오히려 기대에 못 미쳤다. 기계어를 쉴 새 없이 지껄이며 2005년 처음 등장한 퍼비(Furby)를 비롯해 세간의 기대를 한껏 모으며 MIT 미디어랩에서 개발된 지보(Jibo)와 일본 소프트뱅크의 페퍼(Pepper) 등은 사실상 실패에 가깝다.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교감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소셜 로봇들은 주로 돌봄의 역할에 치중하고 있다. 노인들에게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고 외부와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간병로봇이나 발달장애와 같이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동들을 위한 로봇들이다.
그렇다면 SF영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교감하는 로봇의 출현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로봇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로봇과의 감정소통은 불가능하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로봇이 그럴듯한 언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영화 그녀(Her)의 첫 장면처럼 사용자가 로봇(또는 프로그램)의 성별과 성격유형을 선택하면 해당 알고리즘과 데이터가 주는 결과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이보의 사용자나 테오도르가 사만타에게서 느끼는 애정은 감정투사나 자아도취의 한 형태다. 슬프게도 전형적인 나르시시즘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는 기계와의 ‘가짜 교감’을 인간과의 직접적인 감정소통보다 선호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람과의 소통은 너무 예측 불가능하고 불완전하며 또 상처를 주고받는다. 인간의 감정에는 깔끔하게 계산할 수 없는 지저분한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기계는 단조로울 수 있지만 사람은 질척거리며 나를 귀찮게 한다. 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를 만들고자 나선 대망의 21세기, 인간은 스스로 기계처럼 돼 가고 있다. 외로움과 나르시시즘의 독방에서 로봇과의 사랑을 상상하며 우리를 진짜로 성장시키는 인간과의 사랑을 거부하고 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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