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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상준]한국은 다시 일본에 뒤처지는가

바람아님 2019. 3. 1. 07:53


동아일보 2019.02.28. 03:01

 

소학교서 배운 일어 기억하는 父, 日 따라잡을 대상.. 지금은 아냐
소니 히타치 도요타 화려한 부활중
일본에 연구개발비 7년째 뒤처져, 韓 기업들 미래 청사진 없어 걱정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나는 1998년 11월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채용 면접을 보기 위해서였다. 모든 커리큘럼을 영어로 강의하게 되어 있는 그 대학의 브로슈어는 영어와 일본어로 쓰여 있었다. 귀국 후 부모님께 브로슈어를 보여드렸다. 사진이라도 보시라고 별생각 없이 보여드렸는데, 아버지가 뜻밖에도 일본어로 쓰인 부분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한 번도 아버지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나보다 더 놀란 쪽은 아버지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소학교에 입학했고 일본어로 수업을 받았다. 조그마한 시골 학교라서 교장만 일본인이고 교사는 모두 한국인이었지만 수업은 과목과 관계없이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어린 소년은 일본어를 국어로 알았고, 금세 일본어 실력이 늘어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방과 후 집에 오면 일곱 살 연상의 누님이 아버지를 붙잡고 ‘가갸거겨’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그 글이 어떤 글인지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는 채 놀 시간을 뺏긴 게 억울했는데, 누님은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해방되고 일본인 교장을 제외한 교사는 그대로였지만 이제 아무도 학교에서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본어를 쓸 일이 없었고 일본어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소학교 1, 2학년 때 배운 일본어는 반세기가 넘도록 아버지 머리에 남아 있어서 아버지 자신을 놀라게 했다. 나는 큰고모에게 어떻게 독학으로 한글을 깨쳤는지, 왜 동생에게 한글을 가르쳤는지,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는 건 해방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한 말인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와세다대에서 학생들이 나를 ‘센세이(선생님)’라고 부를 때, 나는 가끔 돌아가신 고모를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이 좋아서 한글을 독학으로 깨친 일본 학생을 만나면 나는 그 얘기를 고모에게 해 주지 못해 안타깝다. 내 조부모 세대는 나라를 빼앗겼고, 내 부모 세대는 식민지에서 태어나 침략자의 언어를 국어로 배웠다. 내 세대는 늘 일본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듣고 자랐다. 그러나 나는 내 자녀와 학생들에게 일본을 따라잡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새 이미 일본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70여 년 전 국어 시간에 일본어를 가르쳐야 했던 한반도의 교사들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꿈이나 꾸었을까.


그러나 최근 일본 기업은 다시 도약하기 시작하는데 한국 기업은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 불분명한 것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한때 한국과 중국의 추격에 고전하던 일본 기업들은 이제 다시 달아나고 있다. 1980, 90년대의 워크맨, 2000년대의 플레이스테이션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 전자기업 소니는 휴대전화, TV, 컴퓨터 등 주력 사업에서 삼성전자 등에 쫓기면서 추락을 거듭해, 2009년에는 2000억 엔의 적자를 봤다. 일본이 망해가는 듯하던 1998년에도 5200억 엔이라는 영업이익을 달성한 회사였기에 더 충격적인 추락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결산에서 7300억 엔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실적을 발표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최근 몇 년간 사상 최고의 영업이익을 달성한 것은 히타치나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모두 일본 최대의 상장기업이고 한때 마이너스 영업이익으로 충격을 준 기업이기도 하다. 소니는 게임기, 영상 매체, 로봇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히타치는 빌딩과 기차, 도시의 시스템 분야에서 상당한 실적을 내고 있다. 도요타 역시 미래형 자동차 시장에서 여타 첨단 기업들에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세계적 컨설팅 기업인 PwC가 발표한 연구개발비 상위 1000개 기업에는 한국 기업 34개사와 일본 기업 161개사가 포함되어 있다. 한일 간 같은 업종의 경쟁사를 비교하면 대부분 일본 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가 더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7년간 단 한 번도 한국 기업의 연구개발비 비율이 일본보다 높았던 적이 없다.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게 협력하고 경쟁하는가 했는데 다시 뒤처지기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삼일절을 하루 앞두고 마음이 무겁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