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직후여서 아이들은 신발을 신을 형편이 못 되었다. 맨발로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시내에 갔다가 아나톨리 김에게 노란색 고무신을 사다줬다. 황홀했다. 냄새까지 좋았다. 그런데 고무신을 신고 나간 날, 문제가 생겼다. 목이 마르자 신발을 강가에 벗어놓고 강 깊숙이 들어가 물을 마시고는 신발을 그대로 둔 채 집으로 간 것이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고 강가로 달려갔지만 고무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근처에 있는 목동에게 물으니 강으로 물을 길러 왔던 옹기장이 노인이 가져갔을 거라고 했다.
노인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가족이 없었으며, 주름살이 많은 얼굴은 늘 싸늘하고 악의적으로 보였다. 노인은 아나톨리 김의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의외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노인은 고무신을 돌려주고 아직도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서 바래다 준 뒤 헤어질 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동포 노인이었다.
소년은 노인의 다정한 목소리와 행동, 손길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것이 소년에게는 한 톨의 씨앗이 되었다.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다람쥐’ ‘아버지의 숲’ ‘켄타우로스의 마을’ 등과 같은 아나톨리 김의 철학적이고 환상적인 소설들에 배어 있는 인간중심주의는 그 씨앗이 맺은 열매였다. 유년 시절의 경험과 추억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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