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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제크 칼럼] 가슴에서 성기까지, 이참에 아예 배설까지도

바람아님 2019. 3. 15. 07:55
한겨레 2019.03.14. 18:06

이 글의 다소 품위 없는 제목은 최근 ‘여성 억압’과의 싸움과 관련된 어떤 미심쩍은 경향을 표현하고 있다. 먼저 여성의 가슴에 대한 물신화를 끝내고 유방을 여성 신체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여성도 가슴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들은 상의를 탈의하고 도심 시위행진을 벌이곤 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여성의 가슴에 대한 성애화를 멈추자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궁극적인 성적 대상화의 부위인 여성의 성기를 탈신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미 여성의 유방 사진과 남성의 성기 사진을 담은 사진집 두 권을 출간한 바 있는 사진가 로라 도즈워스는 최근 여성 100명의 성기 사진을 담은 사진집 <여성성>을 출간했다. <가디언>은 도즈워스의 신간 사진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도즈워스의 목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도즈워스는 새 사진집에서 여성과 젠더 비순응자 100명의 성기 사진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사진집 <여성성>은 도즈워스의 세번째 프로젝트다. 도즈워스는 첫번째 사진집 <벌거벗은 진실>에서 여성의 유방을, 두번째 사진집 <남성성>에서 남성의 성기를 소개한 바 있다. 도즈워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여성의 성기를 성적 행위와만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나눈 이야기 중에는 ‘섹시’하지 않은 것도 무척 많았어요. 월경, 완경, 불임, 유산, 낙태, 임신, 출산, 암 같은 이야기 말이죠.’ 도즈워스는 자신이 여성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위 기사도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 “여성의 성기는 새로운 문화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자 린 엔라이트는 <질: 여성의 몸 다시 배우기>를 며칠 전 출간했다. 스웨덴 예술가 리브 스트룀퀴스트는 베스트셀러 <이브 프로젝트: 페미니스트를 위한 여성 성기의 역사>에서 여성의 성기와 월경을 다룬다. 영국 뮤지컬 <벌버린>은 여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그림 수업에서 “여성의 성기를 살펴보는 워크숍”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들이 월경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캠페인까지 등장했다. 그렇다면 아예 끝까지 가서 배설 행위를 탈신비화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배설 행위를 살펴보는 워크숍’ 같은 행사를 여는 것은 어떨까?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자유의 환영>을 본 사람이라면 식사와 배설이 뒤바뀐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변기에 앉아 함께 배설을 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중 시장기를 느낀 남자가 일어나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집 하녀에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제로 해보면 어떨까?


오해의 여지를 피하기 위해 먼저 말해두겠다. 여성의 성기를 탈신비화하려는 시도들은 정당하고 또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여성 성기가 남성 욕망의 신비화된 궁극적 대상으로 물신화되고, 여성 억압적인 체제에 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슨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일까? 다시 부뉴엘로 돌아가 보자. 부뉴엘은 ‘평범하고 단순한 욕망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실현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모티브로 영화를 여러 편 찍었다. <황금시대>에서는 남녀 한쌍이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그때마다 엉뚱한 일들이 생겨 그들의 바람은 계속 좌절된다. <범죄에 대한 수필>에서는 주인공이 살인을 하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계속 실패한다. <절멸의 천사>에서는 상류 사회 사람들이 만찬을 마치고 저택을 떠나려 하지만 번번이 문밖을 나가지 못한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서는 주인공들이 만찬을 함께 하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로 계속 식사를 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는 늙은 남자가 자신의 젊은 연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여자가 수를 쓰는 바람에 그들의 성관계는 끊임없이 유예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사물’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욕망의 숭고한 대상을 체화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었던 행위가 실현불가능한 행위가 된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하려는 행위는 저택의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나 지인들과 만찬을 함께 하는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행위가 성스럽고 금지된 타자의 공백을 차지하자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들이 생겨나면서, 원래 하려던 행위는 절대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라캉이 승화라는 개념을 어떻게 보았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캉은 승화를 “대상을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 즉 끊어지기 쉬운 단락 회로 속에서 대상을 불가능한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파트너와 성적으로 강렬한 상호작용을 나눌 때, 적절하지 않은 말이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쉽게 성적 긴장감을 잃고 승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 한 남자가 성적 열망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여자의 성기를 들여다보면서 곧 경험할 쾌락을 기대하고 있다고 치자. 그러다 어떤 일이 생겨 분위기가 깨진다. 이제 성적 열망에서 깬 남자가 느끼는 것은 오줌과 땀 냄새밖에 없다. 이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라캉 식으로 보자면, 이 장면에서는 승화와 정확히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의 성기는 “위엄을 갖춘 사물의 수준”에서 떨어져 일상적 현실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승화와 성애화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애에서,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은 얼핏 전혀 다른 개념처럼 보일지 모른다. 성행위가 사람 간에 일어나는 가장 친밀한 행위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행위에 참가하는 주체들이 절대로 외부적 관찰자의 태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볼 때는 성행위가 적어도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그 행위는 매우 강렬한 반면, 일상적 삶은 무심하고 침착하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날 여성의 성기를 탈신비화하려는 시도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런 시도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여성의 성기가 남성 욕망의 물신으로 대상화된다고 비판하려다, 성애를 가능하게 하는 승화의 기본 구조까지 침식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인간의 성적 긴장이 모두 사라진 평범하고 단조로운 세상이다. 그들은 ‘탈물신화’된 신체기관을 전시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평범해진 신체기관에 불과할 것이다.


승화에서,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될 수 있는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고 임의적이어서 어떤 평범한 대상도 불가능한 사물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다. 승화의 이런 특성을 안다면, 성적 승화를 가부장적 신비화에서 쉽게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오늘날 만들어지고 있는 성애의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가 얻게 될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두 거장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억압적 탈승화’다. 성애의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의 성적 기관은 탈승화된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자유가 아니라 성이 완전히 억압되는 음울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번역 김박수연



*성애[] 사람 사이 성적 애정. 또는 이것에 말미암은 여러 가지 행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