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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인문학산책] 화 돌보기

바람아님 2019. 3. 25. 07:54

세계일보 2019.03.22. 23:04

 

화는 참거나 분출의 대상 아냐 / 집착하지 말고 매순간 충실해야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엄마가 두려운 건지, 싫은 건지 아니면 두려우면서도 싫은 건지 귀를 막고 서있는 아이의 영상이 오래 남았다. 자기 원칙에 맞지 않으면 다그치고 소리 지르며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어른이 힘 있는 어른일 때 그 어른에 기대 성장해야 하는 아이는 기가 죽는다. 기가 죽어 ‘자기다움’을 잃어버린다. 모든 아이는 학대받고 싶지 않다. 아이는 사랑받고 싶다. 그런데 그 어른은 왜 그렇게 성장했을까. 그도 그렇게 별거 아닌 일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며 무차별적으로 화를 내는, 분노 많은 어른 밑에서 화받이로 성장한 것은 아닐는지. 그리고 나서 사춘기를 지내며 지금까지, 자기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없이 그대로 어른이 된 것인지도.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는 누구나 화가 난다. 그런 점에서 화 그 자체는 생명활동이다. 그것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사인이며 그리하여 그 상황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무의식의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그러나 화는 불씨와도 같아서 화를 내기 시작하면 화가 화를 부른다. 화의 불씨가 불꽃이 돼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를 내기 이전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 진실을 아는 까닭에 옛 어른들은 화를 내지 말라고, 화를 참으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화를 참으면, 꾹꾹 참으면 화는 종종 참고 있는 그 사람을 폐허로 만든다. 위장이 탈이 나거나 심장이 아프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화를 참기만 하는 건 독을 삼키고 있는 것과 같다. 화를 참으면 내가 아프고, 화를 내면 내 세상이 아프다. 그러니 화는 참아서도 안 되는 것이고 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화는 풀어야 하는 것이다. 풀지 못한 화가 쌓여 있어 조그마한 자극에도 불쑥불쑥 화를 내는 사람의 세계는 용암과도 같아서 표정이 있는 사람,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옆에 집을 짓지 못한다.


20년 전 “화는 보살핌을 바라는 아기”라며 ‘화’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를 가지셨던 틱낫한 스님이 벌써 아흔을 넘겼단다. 그리고 작년 10월 드디어 베트남으로 돌아가 16세에 출가했던 절에서 바랑을 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삶으로도 수행으로도 “나에게는 집이 없고 고향이 없다. 나는 마음 챙김을 고향으로 삼는다”고 고백한 수행자이건만 40년 가까운 망명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내겐 왜 그렇게 짠했는지 모르겠다. 평생 우리에게 어떻게 마음을 보살펴야 하는지를 알려준 보살에게 우주가 열반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와서 “이제 내생의 수레바퀴가 멈추어간다고 했다”던 그의 새 책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를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과 사가, 목적과 수단이, 세속과 탈속이 둘이 아닌 그의 마음 챙김(알아차림)의 세계를 확인했다. “알아차림의 햇빛 안에서 하는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신성하다. 이 빛 안에서는 성(聖)과 속(俗) 사이에 경계가 없다. 설거지를 그렇게 하면 많은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나는 매순간을 충실히 살고 그래서 행복하다. 설거지는 그 자체가 수단이면서 목적이다. 우리는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만 설거지를 하는 게 아니다. 설거지 자체를 위해서, 그릇 닦는 순간을 충실히 살고, 자기 삶에 진실히 접속하기 위해서, 그래서도 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설거지할 때는 설거지만 하는 사람, 밥 먹을 때는 밥만 먹는 사람, 걸을 때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며 걷기만 하는 사람, 그가 틱낫한이다. 그러면 우리는 묻는다. 설거지할 때 설거지만 하고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누가 다른 일을 하느냐고. 그러면 좋으련만 과연 그런가. 대부분의 우리는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못하고 온갖 생각을 함께 먹는다. 밥이 아니라 건강염려증을 먹고, 기분 나쁜 사람을 생각해서 화를 먹고, 할 일을 생각하며 근심을 먹는다. 설거지할 때도 마찬가지다. 늘 순간을 소외시키며 순간에 소외돼 있는 우리에게 틱 스님이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순간이라고. 버려야 할 순간은 없다. 어쩌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순간뿐인지도 모르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