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4.04 권지예 소설가)
'개츠비'가 되고 싶었던 아이돌… 그에겐 돈이 목적이 됐고 여성은 '접대용 물건' 취급
개츠비가 어릴 때 그랬듯 괴물로 변한 우리 청년들도 순수했던 시절 있었을 텐데
권지예 소설가
까도 까도 양파 같은 '버닝썬 게이트'는 우리 사회 이면의 온갖 추악하고 어두운 범죄의 종합 세트 같다.
도화선이 되었던 수개월 전 강남의 '버닝썬' 클럽의 폭행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실체가 드러날수록 그 익숙한 민낯과 대면하게 된다. 사실 그동안 물질적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꼰대'들의 모습인데 서른 전후의 청년들이 이보다 '더 꼰대스러운' 실망스러운 짓을 하니
아연해진다. 특히 사건의 축인 승승장구하던 아이돌 그룹 출신의 사업가 '승츠비'.
승츠비는 개츠비가 되고 싶었던, 아니 스스로를 개츠비라 여겼던 승리의 별명이다.
개츠비라니. 셰익스피어를 읽기보다 미국 소설 읽기를 좋아했던 영문학도였던 처녀 시절 내게 개츠비는 낭만적 사랑의
한 이상형이었다. 하얀 플란넬 양복에 은빛 셔츠, 금빛 타이를 한 미소가 아름다운 젊은 신사 개츠비. 오로지 사랑했던
한 여자만을 위해 5년 만에 거부가 되어 돌아와 변치 않는 사랑을 고백했고, 결과적으로 목숨까지 바친 남자였으니.
승츠비라니. 1925년에 출간되었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지금 다시 꺼내 읽어본다.
승츠비와 개츠비는 30세 전후의 나이로 둘 다 젊고 잘 생기고 사업수완이 좋다. 그리고 둘 다 파티 왕이다.
개츠비는 옛사랑 데이지와 재회하기 위해 그녀의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 대저택을 마련하여 매일 초호화 파티를 연다.
수많은 사람이 그 저택의 불빛 아래 부나비처럼 모여들었다. 승츠비 또한 파티를 즐기고, 그가 대표로 있던 '버닝썬'의
타오르는 열기에 수많은 젊은이가 환락을 위해 모여들었다. 두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돈을 벌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그러나 두 남자는 돈과 여자를 대하는 지점이 다르다.
개츠비에게는 돈이 수단이 되었지만, 승츠비에게는 돈이 목적이 되었다.
개츠비에게는 사랑하는 여성이 목적이었지만, 승츠비에게 여자는 접대용 물건으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수단이든 목적이든 불법과 범죄로 돈을 번 것이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5년 전 상류층 여자 데이지는 개츠비를 차고 상류층 남자 톰과 결혼했는데, 개츠비가 원한 것은 데이지가 톰에게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어"라고 선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선언으로 지난 세월을 모두 무효화시키고 톰을 떠난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그의 현실적인 계획이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세 사람이 담판을 지으려는 그날 데이지와 개츠비가 탄 차가 교통사고가 나는데, 톰의 정부인 머틀이 즉사한다.
머틀의 남편 윌슨이 찾아왔을 때 톰은 뺑소니친 운전자가 개츠비라고 말한다. 윌슨은 개츠비의 저택으로 찾아가
수영장에서 데이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개츠비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자신도 자살하고 만다.
사실은 데이지가 운전했지만 자신이 운전했다며 그녀를 보호하던 개츠비는 허망하게 죽음을 맞는다.
개츠비의 죽음 직후 데이지와 톰 부부는 떠나버리고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인 닉과 개츠비의 아버지만 빼고서.
수십년이 지나 다시 읽은 개츠비는 위대하다기보다 불쌍했다.
'무모한 희망에 대한 재능'과 과도한 낭만성을 소유한 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결혼한 과거의 여인에게 집착하며,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 사랑했다고 강요하는 것은
요즘의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으로 보면 어쩌면 스토커의 폭력에 가깝다.
오히려 눈물겨운 장면으로 다가온 게 있는데, 개츠비의 아버지가 돈 벌어 자신에게 집을 사준 효자 아들을 자랑하며
어릴 때부터 아들이 자기 계발에 철저했다며 개츠비가 소년 시절에 간직했던 책의 뒤표지를 보여준다.
소년 개츠비는 거기에 시간 계획표와 결심 항목 리스트를 적어놓았다. 오전 6시 기상에 운동과 각종 공부, 아령 들기와
웅변 연습 등등… 결심 항목으로는 이틀에 한 번 목욕, 매주 3달러 저축, 매주 교양서적 읽기, 부모님께 잘해 드리기.
어느 누구든 세상에 나아가기 전에 순수한 소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버닝썬 게이트'로 괴물로 변한 청년들을 보며
우리 기성세대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소년을 괴물로 키운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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