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5.01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무기력한 채 고통스럽기만 하니 차라리 죽여 달라는 대한민국!
BH의 '염치없는 손'이 촉발시킨 국회 패스트트랙 사태
밑천 떨어진 탁현민이 연출한 '먼, 길' 아닌 '막힌 길'
이대로 망할 것인가, 다시 기적처럼 회생하려나?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망해봐야 안다. 망해야 한다. 망할 수밖에 없다."
점점 옥타브가 높아지고 악센트가 강해지는 이런 말들을 요즘 주변에서 부쩍 더 많이 듣는다.
물론 진짜 망(亡)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리라.
다시 흥(興)하고 싶다는 강력한 반어법이겠지만 정작 그렇게 흥망을 견주는 애증의 대상으로서의
대한민국은 지금 스스로 안락사하고 싶어 안달 난(?) 말기 암 환자처럼 보인다.
무기력한 채 고통스럽기만 하니 차라리 죽여 달라는 것이 안락사일진대 지금 대한민국이 그 지경이란 이야기다.
# 연일 우리 눈앞에 보였던 것은 '패스트트랙' '사보임'이란 생경한 용어와 함께 쇠망치와 빠루가 다시 등장한
몸싸움 국회였다. 하지만 이런 못난 국회 모습을 촉발시킨 진짜 발단은 정작 자신들만 쏙 뺀 채 공수처법안이란 안전핀 뽑힌
수류탄을 국회 사개특위에 '쓰윽' 밀어 넣은 청와대의 '염치없는 손' 아닐까?
그 염치없는 손에 얹혀 누구도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비틀린 수학 공식 같은 '묻지 마 선거법'을 여권 내부에서조차
다듬지도, 채 조율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패스트트랙에 태우려던 것 아닌가!
하지만 공수처든 연동형 비례든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보다 앞설 순 없다.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는 국민적 원성을 확산시킨 핵심에 바로 이런 우선순위의 뒤바뀜이 숨어 있는 게다. 이 와중에 경제와
민생은 뒷전에 놓고 4·27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1주년을 기념한다며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도보다리와 DMZ 앞에서
국내외 클래식 연주자들을 동원해 윤이상과 바흐의 곡들이 허공에 떠다니게 하는 것을 보니 꼭 짝 잃은 외기러기 신세를
애써 드러내려는 것 같아 안쓰럽고 씁쓸했다.
특히 "밑천 다 드러났다"며 청와대를 떠났던 탁현민이 '대통령 행사 기획 자문위원'이란 직함을 달고 돌아와 나름 애는 썼는지
모르지만 그처럼 살갑게 다가와 곧 뚫리고 이내 하나 될 것 같던 북은 그날의 행사 타이틀처럼 정말이지 '먼, 길'이 아니라
'막힌 길'이 되어 있었다. 정작 북은 눈길조차 안 주는데 '오지랖'이란 말을 들어가면서도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가 뭘 바라보며 가겠다고 이러는가' 하고 한숨만 나온다.
# 게다가 요즘 뉴스의 절반은 마약과 관련된다. 여기에 집단 성폭행이 따라붙는다.
조현병 등 정신 이상자의 집단 살상극은 차라리 간주곡이다.
마약이 번져 간다는 것은 단지 향정신성의약품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회가 방향과 의욕을 잃었다는 또 다른 증표다. 사회가 건강하면,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들이 일하고자 하는
의욕에 차 있고 삶의 구체적인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마약이 그다지 힘을 못 쓴다.
하지만 사회가 약해지면 마약은 급속히 퍼진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이 그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적어도 국내에서는 독립의 의지도, 민족의 나아갈 방향도 상실한 채 사회 전체가 마약의 볼모가
되어버렸다. 시골이고 도시고 가릴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에 마약쟁이가 넘쳐났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 전조가 나타나고 있는지 모른다. 재벌 3세 몇 명 잡아들이고 연예인들 굴비 꾸러미 엮듯 잡아넣는다고
확산되는 마약이 수그러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마약이 일반인들 사이에도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 경험자들 사이에서는 대마나 마리화나 정도는 마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전직 검찰 고위자조차 대마 핀 사람들까지 일일이 구속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사석에서 말한다.
그만큼 확산의 범위와 속도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집안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면 이미 바퀴벌레
수 백 마리가 어딘가 음습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회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나아갈 목표나 방향을 갖고 있으면 마약에 대한 사회적 저항력이 강화돼 유혹에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식으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사회에서는 일반인도
쉽게 마약에 빠져들 수 있다. 마약에 빠져들게 만드는 사회, 대한민국이 안락사의 길로 가고 있다는 또 다른 증좌다.
# 물론 대한민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적어도 해외에서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경제 규모나 문화 역량 면에서 세계 톱클래스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아직은 삼성전자나 방탄소년단(BTS)이 열일 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부 동력은 이미 번아웃(소진)된 상태다. 뭔가 저질러보겠다는 생각조차 없다.
도전은 연예 프로그램에나 나오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분발이니 분투니 하는 용어는 생경하다 못해 꼰대들의 용어로 굳어버린 지 오래다.
모두 더 편한 것, 더 안전한 것만 찾는다.
애만 낳으면 돈 준다는 전국의 지자체가 차고 넘치는데도 정작 우리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만 6세 미만이면 재벌 손주들에게도 예외 없이 월 10만원씩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나라다.
이제 조만간 장례수당 나올 날도 머잖았다.
하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것은 삶의 버거움이기보다 무기력이다.
이 무기력은 어디서 발원하는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도 별 소용없고, 설사 좀 번다한들 세금 내기 바쁘면
차라리 그냥 가만있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왜 안 들겠나?
젊은이든 나이 든 사람들이든 애써 되지도 않는 구직 노력을 하느니 구직한다는 흉내나 내면서 실업수당 타 먹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좌절이 무기력을 낳고 그 무기력이 다시 사회적으로 증폭되며 더 큰 좌절로서의
국가적 안락사의 길로 너나 할 것 없이 떠밀고 있다.
이대로 망할 것인가? 아니면 기적처럼 회생할 것인가?
그 역사적 갈림길에서 대한민국이 벌거벗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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