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9.05.20. 15:56
‘좌파독재’라는 말이 진짜 대통령을 분노시킨 모양이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자유한국당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번득였다.
지난주 신문칼럼(‘좌파독재 아니면 우파독재라고 해야 하나’)에서 달○ 아닌 좌파독재라는 ‘막말’에 대통령이 분노한 것이라고 썼던 나는 찌릿한 책임감을 느낀다. 상대의 아픈 곳을 찔렀다는 미안함에, 대통령이 전선(戰線)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우려, 그럼에도 그런 연설문을 거르는 충신 한 사람 없다는 암담함에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과거 비판이라니
여당이 국민 아닌 대통령만 보는 모습은 더욱 절망적이다. 그래도 새누리당 시절엔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여당 의원들이 있었다.
이번 여당은 “당연한 말에 심기가 불편한 자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독재자의 후예임을 자인하는 꼴”이라는 논평으로 장단을 맞췄다. 한심한 자책골이다. ‘좌파독재라는 당연한 말에 심기가 불편한 자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좌파독재임을 자인하는 꼴’이라고 공격받을 여지를 열어준 셈이다.
좌파독재라는 말이 싫으면 우파독재를 하면 될 것이고, 그것도 싫으면 독재를 안 하면 된다. 요컨대 자유한국당의 정부 비판은 ‘현재’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나의 현재는 나의 책임이므로 잘못이 있으면 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비판은 다른 문제다. 그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출신문제를 지적하는 건 공정치 않다.
●私人간에도 출신은 건들지 않는다
사인(私人)간에도 상대의 부모를 비판하면 싸움은 다른 차원으로 접어든다. 내 부모가 너무나 중해서일 수도 있지만 내 부모가 못나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죽일 수도 없고, 죽인다 해서 내 부모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출신을 건드리는 건 비겁하고도 치사하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이 전두환·노태우의 민정당과 1990년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으로 탄생한 민자당(민주자유당)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당은 민중당 인사 등 반대파까지 영입해 1995년 신한국당으로, 1997년 조순이 이끄는 통합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밝혔듯, 노태우 대통령은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했고 김영삼 대통령의 사법부는 5·18 진압 주범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했다. 그런데도 한국당을 ‘독재자의 후예’라고 지목한다면, 부관참시를 한대도 해결책은 나올 수 없다. 독재자는 가도 ‘후예’는 남아 있으니까!
●북한같은 출신성분제 연상시켜
물론 한국당이 5·18 망언 3인을 제대로 징계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3인은 전두환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고 새누리당 때 정치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독재자의 후예’라는 말을 한 건 누구를, 무엇을 겨냥했든 지나치다.
지금 살아있는, 대통령의 눈에 보이는 독재자의 후예들이 일제히 정계은퇴를 하고 한국당이 자진폐쇄 한다고 해도 3족을 멸하지 않는 한, ‘그 후예’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과거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 왕조가 가족의 과거사를 기준으로 주민을 관리 통제하는 출신성분제를 연상시켜 소름이 돋는다.
더불어민주당이야말로 1997년 DJP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낳은 새정치국민회의 후신이 아니냐고 굳이 지적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와 쿠데타를 함께 했던 JP(김종필)이 김대중과 손잡지 않았으면 DJ대통령이 불가능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5·18 피해자 DJ는 야당 총재시절인 1997년 8월 “김영삼 대통령 임기 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을 언급했다. 대통령 당선 뒤 청와대회동에서 YS가 전·노 대통령 사면을 제안하고 DJ가 동의하는 모양새를 갖춘 건 지금 생각해도 멋진 정치였다.
●화해를 통한 과거사 극복의 정치
YS는 스스로 시작한 과거청산을 마무리해 국민역량을 집결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DJ는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화해 통합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DJ가 화해를 통한 과거사 청산을 꾀한 것은 그래야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적, 역사적 권위가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도 그래야 극복할 있다고 봤다.
전두환은 2009년 8월 14일 DJ 병문안에서 “현직에 계실 때 전직(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며 고마워했다. 부인 이순자도 2017년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제일 편안하게 살았던 것 같다”고 말한 걸 보면 DJ는 정말 훌륭했다.
●애비는 종이었다. 어쩌란 말인가
전직 대통령이 행복한 나라로 가자는 건 아니다. 다만 문 대통령도 3년 후면 ‘전직’이 된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후예다. 그러나 애비가 종이었다고 해서 종의 후예라고 지적질 하는 정치는 반대한다. 조선왕조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 국민 일부라도 출신성분제에 가두려 해선 좌파독재 소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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