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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156] 어느 목선의 神通力

바람아님 2019. 6. 26. 08:48

조선일보 2019.06.25. 03:13

오비디우스 '변신'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북한에서 표류인지 귀순인지 한 목선의 높이가 1.3m인데 그날 파고가 2m여서 레이더가 탐지를 못 했다는 국방부 발표를 들으면서, 파도가 2m 높이의 빳빳한 두둑을 이루고 곧게 행진하고 문제의 보트가 두 두둑 사이의 고랑에 꼭 맞게 끼어 직진하는 재미있는 만화가 그려졌다. 국방부도 그런 상상을 유도할 심산이었을까? 파도는 마치 고체의 조형물처럼 보트를 흔들지도 않고 물 한 방울도 선체와 4명의 탑승 인원에게 튀기지 않았나 보다. 배는 전혀 파도에 시달린 모습이 아니었고 탑승자들도 파도에 부대끼고 물벼락에 넋 나간 모습이 아니었다.

희랍신화에는 '변신'이 자주 등장한다. 신들이 변신하기도 하고 신들이 인간의 모습을 바꾸기도 하는데, 대부분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거나 어떤 비행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다. 정력절륜의 제우스신은 소나기나 백조, 또는 아름다운 하얀 황소로 변신해서 아름다운 여자를 기만하거나 제압하기도 하고, 사랑을 나눈 여자를 질투의 화신인 자기 아내 헤라에게서 감추기 위해서 암소 등으로 모습을 바꾼다. 헤라의 분노는 제우스가 감당해야 마땅한데 죄 없는 여자들이 피해를 본다.

배 바닥에 어로 장비도 별로 보이지 않고 잡은 물고기 한 마리도 안 보이는 목선을 어선으로, 복장이나 자세가 전혀 어부 같지 않은 탑승원들을 어부로 둔갑시킨 힘은 백두신앙 교주의 신통력이었을까,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력이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식의 침투 인력에 의해 생명과 재산을 잃을 수 있는 우리 국민은 그런 묘기를 구경이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백번 지당한 진리다. 이번 사태로 경계 태세 불량, 경계 능력 제로임을 드러낸 국방부는 나아가 그날 파도의 높이, 해류의 방향, 선박의 동력장치 유무, 선박을 예인한 지점 등 거의 모든 사실을 허위로 발표했다. 그리고 목격한 시민에 의하면 '85분간 자연스럽고 능수능란하게 항구를 돌아다녔다'는 4명의 탑승 인원 중 2명을 황급히 송환했다. 그리고 문제의 목선은 폐기 처분한다고 한다. 국민에게는 우리 해안선에, 자기 마을 뭍에 올라오듯 상륙한 괴선 탑승자들의 얼굴과 침입 경로, 그리고 보트의 구조를 엄밀히 살펴볼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나아가 국민의 안전보다 김정은의 심기가 더 소중한 당국자들의 북송을 요구할 권리도.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