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30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철]
법 밖의 존재 '호모 사케르'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전 세계에서 수백만 장이 팔린 인기 게임 '워크래프트 3'에 나오는 한 장면.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왕세자가 어떤 이유로 악에 휩쓸려 타락한다.
원정길에서 승리한 그는 개선장군으로서 입성하여, 대뜸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댄다.
당황한 국왕은 묻는다. "아들아,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아들은 태연하게 답한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이것은 인류의 문화적 DNA 깊은 곳에 새겨진 논리다.
인류학, 종교학, 신화학의 선구자 격인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사제가 되고 싶으면 현재의 사제를 죽여야만 했다. 전임자를 죽이고 사제가 된 사람도
언젠가는 자기보다 강하거나 교활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사제는 이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동안 왕의 칭호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적 DNA에는 살인을 하지 말라는 명령 또한 깊게 새겨져 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처벌받고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하지만 왕을 죽인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살인자가 왕이 된다. 이것은 모순 아닌가?
신화적 사고방식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왕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은 법 위에 있는 존재이며, 법 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왕을 죽인 자는 법에 의해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 외의 존재인 왕의 자리를 넘겨받는다.
그렇다면 법 바깥의 존재가 법의 '아래'에 있다면 어떨까.
공동체에서 쫓겨나 모든 법적 보호를 박탈당한 추방자들의 운명이 바로 그러했다.
고대 게르만법에 따르면 추방당한 자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왕과 마찬가지로 법의 바깥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추방자들은 때로 마을과 도시 주변을 맴돌다가 늑대 인간 전설의 소재로 기억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 역시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 불렸다. 가장 고귀한 존재와 가장 비천한 존재가,
인간의 영역 밖에서 '신성한 인간'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법 바깥의 존재는 한없이 높거나 한없이 비천하다.
한쪽은 모든 권력을 가지는 반면 다른 쪽은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바로 이 문제에 주목했다. 그는 호모 사케르라는 역설적 개념을 통해
모든 법과 정치의 토대가 되는 권력, 즉 주권의 본질을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책 '호모 사케르'는 고대 그리스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건드린다.
아감벤 특유의 병렬적 서술 때문에 읽다 보면 미궁에 빠지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면 사실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다.
국가 혹은 공동체의 권력이란 누가 '우리'에 속하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그 핵심이라는
주제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전제한다.
법과 정치의 문제란 그 보호를 '어떻게' 받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법적 절차가 공정한지, 경찰이나 검찰 등 공권력이 제대로 견제받고 있는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어떻게 선출되는지 등이 정치의 본령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국민'이 누리는 법적 보호란 '비국민'에 대한 법적 배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있었던 무참한 인권유린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이 까다로운 현대 정치철학 개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영토는 헌법 제3조에 따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이고, 북한 주민들은 현재 실효적 지배 영역 바깥에 있지만
우리 국민이다. 한국인은 헌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설령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수사받고 변호인의 조력을 통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정부는 귀순 의사를 밝힌 북한 선원 두 명을 강제 북송했다.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헌법적 권리가 단번에 부정된 것이다.
자신이 시민으로서, '사람'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들은,
졸지에 법 바깥에 놓인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 대한민국 국민이 그 어떤 명확한 근거도 없이 공동체에서 배제당하고 만 것이다.
설령 그 두 명이 청와대 해명대로 입에 담기 어려운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북한으로 추방한 것은 팔다리를 묶은 후 바다에 내던진 것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바닷물에 빠진 것보다 길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뿐이다.
현 정권의 지지자 및 구성원은 군사정권 시절 벌어진 소위 '사법 살인'을 목청 높여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재판을 받아야 할 국민을 법 바깥으로 내던져버린 이 사건은 뭐라고 해야 좋을까.
'무법(無法) 살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무법 지대를 없애는 것, '호모 사케르' 영역을 최소화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진보와 궤적을 함께한다.
오늘날 문명국가 대부분에는 법 위의 왕도 없고 법 아래의 추방자도 없다.
일부 선출직 공직자가 재임 중 형사소추를 받지 않는 정도가 그나마 남은 예외 영역이다.
난민이나 이주민에게 최대한 많은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날로 커지고 있다.
법 바깥에 군림하며 통치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 것과, 법 바깥으로 쫓겨나 죽어가는 자들을 방치하지 않는 것은,
동일한 문명적 발전의 결과물인 셈이다.
'호모 사케르'는 난민과 이주민 문제 등을 고민하는 진보 진영의 이론적 근거로 즐겨 인용되는 책이다.
그러나 주권적 폭력의 작동 방식은 좌우를 넘어서는 것이다.
탈북 선원 북송 사건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법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일하는 기관일 뿐인 청와대가, 마치 법을 초월하여 군림하고 통치하는 원시적
신화 세계의 왕이라도 되는 양, 우리 국민을 법 바깥 폭력의 세계로 내몰았으니 말이다.
북한 선원 강제 북송 사건은 역사와 문명의 시곗바늘을 순식간에 야만과 원시로 되돌려놓았다.
시민사회가 진영 논리에 장단을 맞추며 이런 인권침해에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은 더욱 끔찍하다.
허다한 양심적 인문주의자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 바다에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끌어안아야 했을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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