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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영화 & 역사] 미군, 이오지마서 얻은 교훈… "일본은 정상적으론 항복하지 않는다"

바람아님 2019. 11. 28. 08:30

(조선일보 2019.11.28 남정욱 작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美 2차대전 때 일본에 대한 해안 봉쇄·본토 상륙 작전 포기
日 "미군 상륙 땐 1억명 죽창들고 저항할 것"… 결국 핵폭탄 투하
극단 처방 가능했던 건 상대방에 대한 차별·경멸 깔려있었기 때문


남정욱 작가남정욱 작가

그해 여름, 나가사키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도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핵폭탄을 맞은 도시로 기억한다. 안 맞을 수 있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폭탄 별명)가 떨어진다.

일왕은 그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지만 군부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그냥 신형 폭탄입니다."

1945년 3월부터 7월까지 이어진 60여 차례 폭격 중 좀 센 것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군부의 답변이 성실하지 못했던 건 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 몰라서 그랬다.

이제껏 세상에 없던 그 폭탄이 불과 1초 만에 7만명을 마술처럼 증발시켜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두 번째 폭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히로시마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습이라면 수백 대가 날아오는 것으로만

알아 상공에 몇 대 떠 있는 건 정찰 임무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태연히 아침밥을 먹고 출근하다 불벼락을 맞았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떨어질 때 사정도 기구했다. 원래 목표는 나가사키가 아니라 고쿠라였다.

하필 그날 구름이 많이 끼었고 시계를 확보하지 못했던 폭격기는 다음 후보지였던 나가사키로 항로를 돌렸다.

연료가 바닥난 상황이라 어디든 폭탄을 '버리고' 와야만 했던 것이다.

불운도 두 번 겹치면 운명이라지만 나가사키가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해안을 봉쇄하고 굶기면 항복할 것이라는 미 해군의 주장에 미 육군은 무슨 소리, 본토 상륙만이 해결책이라며 맞섰다.

초반에는 봉쇄론이 우세했다. 그런데 일본인들 하는 꼴을 보니 굶기도 잘 굶는 데다 그러면서도 일왕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육군의 발목을 잡은 건 '1억 옥쇄론'이었다.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면 남녀노소 1억명이 죽창을 들고 달려들겠다는 초현실주의적 선언에 미 육군도 선뜻 '고'를

부르지 못했다. 그게 절대로 은유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오지마(유황도) 전투를 통해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피해가 일본군보다 컸던 그 유혈 낭자 공방전을 다룬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구리바야시 중장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목표는 하루라도 미군을 섬에 더 잡아두는 것, 그리고 하루라도 부하들을 더 살게 하는 것이다.

다르면서도 같은 말인 이 전략 때문에 구리바야시의 인격은 돋보인다. 실제는 좀 다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에게 몇 개의 준칙을 하달했다.

'적 열 명을 죽이기 전까지는 죽지 말라'  '한 명만 살아 있어도 적을 끝까지 괴롭혀라'

'폭약을 안고 적의 탱크를 파괴하라' 등등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군 지휘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오지마에서 미군이 얻은 교훈은 일본은 정상적 방법으로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핵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인데 그게 정말 이유의 전부?


[남정욱의 영화 & 역사] 미군, 이오지마서 얻은 교훈… '일본은 정상적으론 항복하지 않는다'
/일러스트=이철원


이 폭탄의 개발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갔다. 예산의 효과 검증과 신무기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미국에

일본은 더없이 좋은 실험 대상이었다. 태평양전쟁은 애초부터 인종차별적 성격이 짙었다.

미국은 대통령부터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 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루스벨트)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을

원숭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미국인을 쾌락에 찌들어 있는 한심한 존재로 경멸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된 미군을 고문하고 참수했다.

미군은 삶아서 살을 발라낸 일본군 유골을 고향집에 기념품 대신 보냈다.

밑바닥에 이런 정서적 '교류'가 깔려 있었기에 핵폭탄이라는 극단의 처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담은 사진 유출을 철저히 통제해 비난 여론을 차단한다.

그리고 피폭자들의 상태를 '과학적'으로 기록했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가죽이 양탄자처럼 흘러내린 부상자들이

실험실의 쥐처럼 끌려나와 검사를 받았다. 조사만 있었고 치료는 없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기에 일본인들은 그 참혹한 현장을 그림으로 남겼다.

사이타마의 마루키 미술관에 가면 당시의 생지옥을 구경할 수 있다.

그때 떨어진 폭탄은 요새 핵폭탄에 비하면 폭죽 수준이라고 한다.

핵을 머리에 이고서도 태평하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한국인을 세계인들이 존경의 눈길로 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