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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뼈아픈 강화도의 비극

바람아님 2014. 1. 30. 11:03
  1637년 1월30일은 역사상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임금(인조)이 오랑캐(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용포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펼쳤다. 신하된 주제에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며, 항복했으니 백마를 타고 나온 것이다. 청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犬)에게 던져주었다. 항복한 조선(개)에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조선의 상징인 임금이 굴욕을 당했던 그날을 '삼전도의 굴욕'이라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든다. 못난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 해서 뭣이 그리 굴욕이란 말인가.

갑곶진.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7년 1월21~22일 사이, 청나라 군의 침입에 함락됐던 오욕의 현장이다. 강화를 지키던 검찰사 김경징 등의 무사안일한 대처로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능욕을 당했다. 갑곶진 앞바다에는 스스로 물에 뛰어든 아낙들의 머릿수건이 연못에 떠다니는 낙엽 같았다고 한다.

삼전도 굴욕 8일 전, 1637년 1월22일의 비극

항복 직후 임금의 앞을 가로막은 한 노파가 손뼉을 치며 통곡했다.

"강화도에서~백성들이 다 죽었습니다. 아들 4명과 남편이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 연려실기술 > )

그렇다. 한심한 임금, 못난 신하들 때문에 죽었고, 욕을 당했던 백성들…. 바로 그들의 눈물로 피바다를 이룬 '강화의 굴욕'이 더 천추에 남아야 할 '비극의 역사'가 돼야 하지 않을까.

"적에게 욕을 보지 않으려는 부인들이 (강화 갑곶 앞) 바다에 빠졌다. (여인들의 흔적인)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둥둥 떠다녔다."

< 연려실기술 > 은 1637년 1월22일의 비극을 정리했다. '삼전도의 굴욕'에 8일 앞선 날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636년 12월8일, 청나라 13만 대군이 순식간에 한양으로 몰려온다.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긴 대가를 치른 것이다. 청나라는 인조가 '금성탕지'였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도록 속전속결 작전을 펼쳤다.

인조는 급히 체찰사(전시 총사령관)인 김류의 아들 김경징(당시 한성판윤)을 강화 검찰사(강화 경비사령관)로 임명했다. 최후의 보루인 강화를 수호해달라는 임금의 특명이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건사할 자세도, 능력도 안되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섬으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짐이 50여바리나 됐다. 그 때문에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 가족인 피란민들이 수십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세자빈(강빈)조차 김포 월곶 나루에서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강빈이 가마 안에서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을까.

김경징은 강화도가 금성탕지(金城湯池·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니 함부로 적군이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사실이 그랬다. 조수의 차가 극심해 물살이 빠른 데다 언덕은 절벽이고, 그 밑은 죄다 수렁(뻘)이니…. 이중환의 < 택리지 > 는 "그나마 배를 댈 수 있는 동쪽의 갑곶진만 잘 지킨다면 외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경징은 지형만 믿고 날마다 술만 퍼마시며 주사를 부렸다. 피란 온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술만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꾸짖자 퉁명스럽게 대꾸했단다.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어찌 피란이나 왔다는 (봉림)대군과 대신들이 나를 지휘하려 드느냐"고…. 그야말로 '콩가루' 나라가 아닐 수 없다. 호언장담한 김경징은 초병들까지 모두 귀가시켰다. < 연려실기술 > 은 "갑곶에서 연미정까지 몽둥이를 들고 지키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러던 1월21일 밤 8시쯤, 통진 가수(假首·임시수령) 김정이 김경징을 찾았다.

"적의 배가 갑곶 나루로 향하고 있는데, 밤에 물을 건너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김경징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군심(軍心)을 어지럽히다니…. 저 놈의 목을 베라."

어이없는 참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갑곶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김정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청군은 딱 한 척의 배로 조선군을 떠보려 했다. 조선의 복병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저항없이 갑곶에 닿았으니…. 실은 몇 안되는 조선군이 총을 쏘려 했는데, 어이없게도 화약에 습기가 차서 폭발하지 않았다. 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군이 보이지 않자 백기로 신호를 보냈다.

22일 아침 순식간에 적선 40여척이 바다를 뒤덮었다. 갑곶에 상륙한 청군 3만명의 칼빛이 번개와 같이 번뜩였다. 온 섬이 도륙당했다. 이때의 참상을 기록한 < 연려실기술 > 을 보자.

"눈 위를 기어다니던 갓난 아이가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죽은 어미의 젖을 여전히 빨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돈오의 아내 김씨는 시어머니와 동서 등과 같이 목을 찔렀다. 김씨가 즉사하고 시어머니와 동서의 피가 옷에 줄줄 흐르자 청나라군이 버리고 갔다. 홍명일의 아내 이씨와 시어머니를 비롯해 여성 3명은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신신당부한 뒤 목을 매 죽었다.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 안에 숨어있다가 적병이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유인립의 아내는 적병이 끌고 가려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청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사대부 여인네들만 수모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천민의 아내와 첩도 줄줄이 목숨을 끊었다. 그랬으니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닌 것'이다. < 인조실록 > 등에는 더욱 기막힌 장면이 나온다.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다.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기가 찰 노릇이다. 아비는 적군이 도착하자마자 줄행랑치고, 아들은 할머니와 어미를 핍박해서 자진하게 한 뒤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못난 임금, 못난 신하, 못난 남편 만난 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 강도몽유록 > 이란 작품을 보라. 강화도에서 죽은 여인 15명의 혼령이 모여 한많은 사연을 토로하는 꿈 이야기이다. 여기서 체찰사(영의정) 김류의 부인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무능한 아들(김경징)을 강화수비의 총책으로 맡긴 것을 한탄한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한 남편의 여인. 오랑캐의 종이 되어 상투를 자른 남편을 둔 여인…. 또 신혼 때 전쟁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지만 남편이 그 사실도 모르고 아내를 의심하고 있다는 여인…. 마니산 바위 굴에 숨었다가 투신자살해서 으깨진 비참한 몰골로 원한을 토로한 여인…. 기생인 마지막 여인이 순절한 여인들을 찬양한다.

"나라의 수치에 의(義)에 죽은 충신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이다."

이뿐인가. 60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못난 임금, 못난 아비, 못난 남편을 만난 죄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성들에겐 '화냥년'이라는 딱지만 붙었고….

지금 갑곶진과 연미정에 차례로 서본다. 겨울바다, 일몰에 반짝이며 일렁대는 갑곶 앞바다, 그리고 500년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연미정 미류나무…. 꼭 376년 전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바람 결에 귓전을 때린다.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가는 60만여 인질들의 피맺힌 합창….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저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 인조실록 > )

이기환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연미정(燕尾亭).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서 한 줄기는 서해로, 다른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습이 '제비꼬리' 같다 해서 '연미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삼포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형 장군(1459~1520년)에게 하사한 정자이다. 황형 장군의 전설은 신비롭기만 하다. 낙향 후 연미정에서 바둑으로 소일하던 장군은 동네 아이들에게 볶은 콩을 나눠 주면서 소나무 묘목을 옮겨오라고 시켰다. 아이들이 싫증을 느끼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면서 소나무를 계속 심었다. 동네사람들이 물으면 '그저 나랏일에 쓰일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황 장군이 죽은 지 72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의병장 김천일이 강화도로 넘어와 병선(兵船)을 만들려고 하다가 황 장군이 조성해놓은 엄청난 규모의 아름드리 솔밭을 발견했다. 이것이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수십 년이나 앞서는 '소나무 양병설'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맹약을 체결했던 곳이었으니까….

1678년(숙종 4년)에는 연미정이 방어시설인 월곶진으로 바뀐다. 조정은 토지수용을 하면서 '손사래를 치는' 황형의 후손에게 '대토 형식'의 보상을 해줬다. "진 설치 후 황형의 후손(황감)에게 보상하려 했지만 힘껏 사양했습니다. 이제 황감의 아들(황익)이 너무 가난하다고 합니다. 간척지라도 대토해주면 거저 빼앗았다는 기롱은 듣지 않을 겁니다."( < 숙종실록 > )

지난 1996년 7월에는 연미정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유도'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집중호우로 떠내려온 두 살배기 송아지가 유도에 표류한 것이다. 비무장지대로 인식돼 있는 곳이라 누구도 손쓸 수 없었다. 송아지는 굶주림 속에 갈수록 여위어 갔다. 보다 못한 우리 군이 북한군과 협의 끝에 이 섬에 들어가 송아지를 구출했다. 송아지는 1998년 제주도 출신 암소와 혼인해 7마리의 새끼를 낳은 뒤 2006년 자연사했단다.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의 불씨는 남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