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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일출…‘풍요로운 여신’의 긴 여운

바람아님 2014. 2. 27. 22:14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가 일출의 햇살에 붉게 물들고 있다.

왜 힘들게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일까?

 

실제로 히말라야에 오르면 기분이 어떨까?

 

힐링이 될까? 뒤늦게 철이 들지는 않을까? 혹시 고산병에 쓰러지지는 않을까?

 

수많은 의문을 안고 마침내 히말라야의 품에 스며들었다.

 

왼편에는 말로만 듣던 8000m급 14좌 가운데 7번째로 높은 다올라기리(8,167m)가 내려보고 있고, 오른편에는 이름도 아름다운 10번째로 높은 안나푸르나(8,091m)가 눈발을 흩날리며 손짓을 하고 있다.

 

평소 사진과 화면으로만 보던 고봉들을 가까이 하자, 그야말로 아스라이 잊었던 그 옛날의 감동과 흥분이 저 깊은 심연의 끝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오래전 헤어졌다가 어느날 우연히 만난 첫사랑의 감정일까?

 

모두들 입을 열지 않는다. 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그 어떤 문자가, 그 어떤 함성과 감탄이라도 이런 기분을 대변해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백미는 해발 3,210m의 푼힐 전망대에서 맞이한 일출이다.

 

산속 롯지의 침낭에서 새벽 4시반에 일어나 뜨거운 스프로 속을 달래고 해드랜턴과 완전 방한 복장을 한채 50분가량 오른다. 전세계에서 온 트레커들이 저마다 부푼 가슴을 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발 한발 정상을 향해 오른다. 저멀리 산너머로 붉은 기운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안나푸르나가 푸른 하늘의 배경으로 눈발을 날리고 있다.

여명에 가득한 히말라야 산야는 신비롭기만하다. 운이 좋았다. 미치게 빨간 해가 동전만한 크기로 모습을 보인다. 꿍덕꿍덕 뛰는 가슴은 온기를 떠안은 햇살과 더불어 춤을 춘다.

 

드디어 안나푸르나 남봉의 허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반짝반짝 금빛을 만들어낸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옅은 구름도 어느새 이쁜 화장을 한다. 수줍은듯 가는 바람에 몸을 실어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날카로운 마차푸차레 봉우리의 배후는 마치 조명을 뒤로 비춘듯 붉은 기운을 성스럽게 머금고 있다. 황홀하다. 이럴때 어떤 기도를 해야할까?

 

고개를 뒤로 돌리니 저멀리 웅장한 다올라기리의 봉우리에 진한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저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얼마나 많은 산악인들이 젊음과 정열과 사랑을 아낌없이 던졌을까?

 

다시 안나푸르나를 바라본다. ‘풍요로운 여신’이라는 뜻의 안나푸르나는 인간이 처음 오른 8000m급 봉우리다. 얼마나 겸손해야 저 높은 봉우리가 오르는 것을 허락할 것인가?

 

5분이 지나자 붉은 기운은 평범한 밝음으로 변한다. 온 몸 가득 채웠던 흥분도 점차 가라앉는다. 또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아쉬워한다. 그런 아쉬움을 안고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자꾸 뒤를 돌아본다. 아! 돌아가신 어머니는 살아 생전 명절에 왔다가는 자식들이 안보일 때까지 고향의 언덕 위에 선 채 손을 흔들어 주셨다.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자식들의 안녕을 바라며 흔들어 주시던 사랑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하는 도중 만난 현주 원주민들.
안나푸르나 트레킹하는 도중 만난 현주 원주민들.
안나푸르나 트레킹하는 도중 만난 현주 원주민들.

 

그렇게 히말라야는 어머니의 손짓처럼 진한 감동을 주었다.

 

지난 1월20일부터 9일동안 한겨레신문사가 23명의 참여자와 펼친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벅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출발때부터 한국에 내린 폭설과 현지 공항에 내린 눈때문에 항공 스케줄이 꼬이며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참여자 모두 인내하며 배려의 마음으로 해발 2500~3000m 사이에서 트레킹을 즐겼다. 산골마을에서 원주민들의 가꾸지 않은 순박함을 만나는 것도 트레킹의 즐거움이었다. 차마고도처럼 짐을 실은 당나귀와 말이 아슬아슬하게 행진하는 사이로, 트레커들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교감을 하며 걷고 또 걸었다. 하루 20km의 길을 나흘간 걷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평소 부지런히 산을 다니던 기자도 사흘째부터는 뒤로 처졌다. 선두는 날렵한 60대 초반의 아저씨와 아줌마. 환갑의 부부는 트레킹 내내 선두를 지키며 건강을 과시했다. ‘독사’라는 별명의 59살 아줌마도 마치 출발선에 선 경주차처럼 항상 ‘부르릉 부르릉’ 활기를 보여줬다. 여고생과 여대생 두 딸을 ‘모시고’ 온 50살 동갑내기 부부는 트레킹 내내 참가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때로는 여중생 딸이 지쳐서 안타깝게도 했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가족 모두 진한 사랑을 보여줬다. 돈 버는 것보다는 건강한 삶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이 가족의 가장은 수의사라는 직업을 뒤로 하고 귀농 준비를 하고 있다. 항상 웃는 얼굴로 포근한 대화를 딸들과 하던 가장은 트레킹이 끝나자 긴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참가한 트레커들이 걷고 있다.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 노동운동가 출신의 47살 가장은 트레킹이 끝날 무렵 산을 싫어하던 아들로 부터 “귀국해도 두달에 한번씩는 아빠와 함께 등산갈래요”라는 약속을 받아 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중학 2학년때 혼자 인도 여행을 했다는 대학 2학년 남학생은 “인도 여행도 좋았지만 높은 산에서 느끼는 자존감은 무척 인상적”이라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한다. 두명의 50대 초반 교수와 한국 고전을 번역하는 명퇴한 국어 교사, 사업가와 전·현직 공무원,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젊은이까지 각양 각색의 남녀노소는 저마다 풍부한 이야기를 트레킹내내 잔잔히 품어냈다. 진한 부부애를 풍긴 40대 후반의 부부는 트레킹 내내 마치 신혼부부처럼 색다른 여행을 즐거워했다.

 

하산길에 만난 74살의 미국 할아버지는 감동적이었다. 전직 미군 특수부대 교관 출신이라는 그는 무려 35kg을 웃도는 배낭을 짊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배낭엔 석달동안 히말라야 산속에서 혼자 지낼 수 있는 식량과 텐트 등 각종 세간살이를 담고 있었다. 악수를 하니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마치 태풍같다. 허기진 그에게 한국에서 갖고간 쵸코바등의 비상 식량을 건내주니 너무도 고마워한다. 자신의 주소를 적어주며 나중에 미국에 오면 로키산맥에서 함께 야영을 하자고 권한다. 꼭 한번 그 언젠가 그와 함께 로키 산맥에 스며들겠다고 다짐해 본다.

 

안나푸르나가 푸른 하늘의 배경으로 눈발을 날리고 있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에 참가한 트래커들이 걷고 있다.

 

비행기에서 본 눈 덮힌 히말라야 산맥은 평온하기만 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흰 세계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아! 아마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도 이런 느낌은 비슷할 것이다.

 

얼마전 세배를 드린 백범연구소장 백기완 선생은 3년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난 3일간 잠을 한잠도 잘 수가 없었어. 창밖에 펼쳐진 광활한 눈덮힌 대지를 잠시라도 놓칠 수 없었지 때문이야. 동행한 사람은 코를 골며 잤는데, 나는 그들이 안타까웠어. 저 멋진 장면을 눈 앞에 두고 어찌 잠을 잘 수 있냐 말이야.”

 

트레킹을 마무리할쯤 참석자들은 한국에 가서도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기로 약속했다. 산악회 총무도 결정됐다. 그리고 산악회 이름은 ‘우여곡절 산악회’로 임시 정했다. 그만큼 이런저런 변수가 많았던 히말라야 트레킹이었다.

 

트레킹 내내 노련한 솜씨로 일행을 안내한 전문 산악인 신동석(49)씨가 “킬리만자로 눈이 다 녹기전에 트레킹을 가자”고 지나가는 말투로 이야기 하자 몇몇 참가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비록 귀국 뒤에고 몇일간 온 몸에 일주일간 트레킹의 진한 피곤함은 남아 있었지만 눈만 감으면 히말라야 설산의 속삭임이 진하게 되살아 났다. 그리고 또 오라고 유혹한다. 매혹적이다. 너무도…

 

네팔 히말라야/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