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선우정의 글로벌 터치 - 아베의 '한 수'

바람아님 2014. 4. 2. 11:09

(출처-조선일보 2014.01.25 선우정 국제부장)



선우정 국제부장 사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다보스포럼 연설장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니 일종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일국의 총리가 왜 저리 가볍게 처신할까' 하는 연민이다.

북한 김정은이 연일 손을 흔들 때 우리는 습관처럼 불길함을 느낀다. 
구밀복검(口蜜腹劍·입에는 꿀을 바르고 배 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에 대한 경계심이다. 
그러면 아베 총리에겐 그런 것이 없을까. 
그저 일을 저질러 놓고 애정을 구걸하는 악동(惡童)을 대하듯이 넘겨버려도 괜찮을까.

이리에 아키라 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외교를 '무사상(無思想)의 외교'라고 표현했다.
 "좋게 말하면 현실주의,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주의가 19세기 말 정한론(征韓論)을 누르고 수립됐다는 사실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그 현실주의로 체력을 길러 결국 정한론을 관철한 역사는 더 씁쓸하다.

일본 외교의 현실주의는 대중 앞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총리 스스로 연출하게 하는 일종의 신념 같은 것이다. 
부시 미 대통령 앞에서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하며 재롱을 부리던 고이즈미 총리의 퍼포먼스는 극단을 보여준다. 
아베의 처신은 고이즈미에 비하면 오히려 묵직하다.

근대 일본의 외교 원칙 가운데 '주권선(主權線)' '이익선(利益線)'이란 개념이 있다. 
주권선은 일본 본토, 이익선은 본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확보해야 할 '내 편'의 범위를 말한다. 
그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한반도는 늘 그 안에 있었다. 
겉으로 말하지 않을 뿐 일본은 지금도 한반도의 위치를 그렇게 그린다.

지금 일본은 한국이 일본의 이익선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여긴다. 물론 과거사를 뒤집는 일본에 큰 책임이 있다. 
하지만 뒤틀린 역사관을 바로잡을 아베가 아니다. 그렇다고 한반도를 포기할 일본도 아니다. 
아베는 어떻게 한국의 이탈을 막으려 할까.

북·일(北日) 수교 움직임은 지금까지 두 차례 있었다. 모두 자민당 정권이 추진했다. 
일본의 이익선을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북·일 수교의 의미는 수교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거대한 돈주머니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아직 지불하지 않은 북한 지역에 대한 식민지 청구권 자금이다. 
14년 전 협상 때 50억~100억달러란 보도가 있었다. 지금 논의하면 더 큰 규모로 불어날 것이다.

이 돈은 일본이 한반도에 진 빚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갚을 것인가는 일본의 선택에 달렸다. 
북·일 수교를 통해 빚을 갚아 김정은 정권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 통일 한국에 빚을 갚아 한반도의 조기 안정에 
기여할 것인가. 일본은 한국이 자국 이익선의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면밀히 측정하면서 저울질할 것이다. 
일본의 선택에 따라 한국의 미래는 요동칠 수 있다.

일본의 외교가 '무사상' '무영혼'이란 사실은 여러 차례 증명됐다. 
미·소(美蘇)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불똥을 피하려고 소련과 수교한 나라가 '친미(親美) 국가' 일본이다. 
미국이 중국에 접근하자 그 사이에 끼어들어 중국과 먼저 손을 잡은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베 총리의 처신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속에 간직한 복검(腹劍)을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 
일본은 여전히 '한 수'가 있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