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선우정의 글로벌 터치 - 美 버지니아와 佛 앙굴렘에서 본 일본

바람아님 2014. 4. 1. 12:04

(출처-조선일보 2014.02.28 선우정 국제부장)


선우정 국제부장

미국 버지니아주의 '동해 병기(倂記)' 결정은 한국 교민이 거둔 승리였다. 그럼 패한 상대는 누구였을까? 버지니아에 사는 일본인이어야 급(級)이 맞는데 실제론 일본 정부였다. 주미 일본 대사가 버지니아주에 '일본 기업 철수' 카드까지 내밀었으니 일본 정부는 나름 총력전을 폈다. 그런데 좀 어색하다. 미국 주(州)의회에서 한국 교민이 벌인 싸움에 일본 정부까지 나설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전직 일본 외교관 마고사키 우케루는 저서 '일본의 영토 분쟁'에서 독도와 관련해 '일본의 역사적 실수'라며 한 가지 사실(史實)을 소개했다. 한국의 독도 지배를 막지 못한 것, 쿠릴 4개 섬 문제처럼 일찌감치 독도 문제를 국가 과제로 끌어올리지 않은 것…. 이런 중요한 일들을 놔두고 그가 지목한 것은 2008년 미국 지명(地名)위원회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미 지명위가 독도를 '한국령(領)'에서 '영유권 미지정'으로 고쳤다가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한국령'으로 바로잡은 것을 말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총력전을 펼쳤다. 막판에는 이명박 대통령까지 방한한 부시 대통령을 붙잡고 "고쳐달라"고 매달렸다. 나라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도 한국 교민이 큰 자극을 줬다. 캐나다의 한국인 사서(司書)가 미국 의회도서관의 독도 주제어 변경 계획을 철회시킨 직후에 이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교민 한 명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한 정부는 명운(命運)을 걸 수밖에 없었다.

대조적으로 당시 일본 정부는 시종일관 쿨한 척했다. 한국이 만든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미국 정부 한 기관의 처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번복으로 머쓱해졌을 때조차 일본 정부 대변인의 공식 발언은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마고사키가 책에서 '일본의 역사적 실수'라고 지적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미국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가는 독도 귀속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1945년 연합국은 '(일본국의 주권을) 우리(연합국)가 결정한 도서 지역으로 국한한다'고 규정했다. '우리'의 중심은 미국이다. 미국이 독도를 한국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령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전후(戰後) 탈피'를 외쳐도 일본은 여전히 미국이 짜놓은 체스판, 즉 '전후 체제' 안에서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반성한 듯하다. 이번에 버지니아주에서 확실히 일본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폼도 체면도 다 접고 덤벼들었다. 역시 실패했지만 프랑스 앙굴렘에서 열린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두고 같은 태도를 보였다. 진흙탕에서 굴러도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한국이 관민(官民) 합동으로 벌이는 역사 전쟁에 일본이 본격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물론 선악의 구도에서 한국의 승산이 높다.

노다 요시히코 전 일본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일본 비판을 "여학생의 고자질 같다"고 비판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방점을 둔 것은 아베 총리가 이 '고자질 외교'를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나라의 정상이었다는 사람의 발언으론 상식 이하이지만, 역사 전쟁을 바라보는 걱정이 말 속에 묻어난다. 노다가 보기에 지금 일본은 승산 없는 싸움에 자꾸 말려들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