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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81] 가게무샤(影武者)의 시대

바람아님 2014. 4. 9. 09:28

(출처-조선일보 2012.09.19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가게무샤(影武者)'라는 인상적인 영화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막강한 영주들이 서로 대립하던 일본의 전국시대 말기. 가장 강력한 파벌 중 하나인 
다케다 신겐파가 공세를 취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두 파벌이 
연합하여 대치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케다 신겐이 저격당해 죽는다. 그는 자기 파벌을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절대로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는 유언을 한다. 
우연히도 죽은 다케다 신겐과 똑같이 생긴 도적이 한 명 잡혀 그에게 연습을 시켜 대역을 맡게 한다. 
이 가짜 무사를 '그림자 무사'라는 뜻으로 '가게무샤'라 한다.

가짜 무사는 너무나 신겐의 대역을 잘 소화해서 적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의 손자들과 애첩까지 속아 넘어간다. 그렇다 할지라도 가짜는 가짜일 뿐, '그림자'는 진짜 신겐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 너무 똑같이 흉내내려 한 것이 화근이었던지, 어느 날 가짜 신겐이 말을 타다 낙마한다. 말은 진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던 것이다. 정체가 탄로나자, 여태 가짜 아버지 때문에 기를 못 펴고 살던 아들이 그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는다. 그러고는 죽은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군대를 움직였다가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진정한 본체의 투영에 불과한 '가게무샤'의 고뇌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아무리 본체를 좇아 보려 한들 그는 다만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미 죽은 본체는 악몽으로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백일도 남지 않은 우리 대선의 모양새가 그림자놀이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유력한 두 후보는 이미 죽은 대통령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듯하고, 또 다른 유력한 후보는 지금껏 본체도 없는 그림자 모습만 
보여주었다. 우리의 지도자를 뽑는 이 중차대한 일에 우리는 언제까지 그림자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오해하지 말 일이다. 
우리는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 짓눌려 살던 그 국민이 아니고, 2000년대 초반 열정 과잉의 그 국민도 아니다. 
시대는 바뀌었고, 우리는 오늘날의 과제를 풀어야 할 새로운 인물을 필요로 한다. 
철 지난 과거 인물의 이미지를 뒤집어쓸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같은 애매한 말도 불필요하다. 
역사는 지금 만들어지는 중이다. 현재의 우리가 판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