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2024. 2. 10. 00:22
[작품편 : 91. 카를 브률로프]
<동행하는 작품>
폼페이 최후의 날
이탈리아의 아침
자화상
서기 79년, 8월24일. 찬란한 도시가 통째로 화산재에 파묻혔다.
폼페이 사람들은 때마침 불의 신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포룸(forum·광장) 일대에 모여 웃고, 떠들고, 노래를 불렀다. 휴양차 이곳에 온 로마 귀족들은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 baths)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였다. 아이들은 연극과 검투사 경기를 훔쳐보기 위해 난전 일대를 쏘다녔다.
베수비오 화산이 뿜는 김은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땅울림 뒤 잔기침하듯 거듭 움찔하던 화산 봉우리는 끝내 모든 걸 토해내듯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화산은 끝내 화약 수백개를 한 번에 터트리듯 굉음을 일으켰다. 화산재가 도시 전체에 폭우처럼 쏟아졌다. 쇳물 같은 용암은 썰물 없는 밀물이 돼 맹렬히 흘러내렸다. 비극은 이렇게 전개와 위기 없이 곧장 절정으로 치달았다.
폼페이 전체가 2~3m에 이르는 두꺼운 잿더미에 덮였다. 도시 인구의 10%가량인 2000여명이 함께 깔려 죽었다. 눈부신 문명도 모두 돌과 흙먼지에 파묻히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의 완전한 몰락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힘을 쏟았다. 하지만 신의 심판 같은 참극 앞에서 그 또한 결국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폼페이의 시간은 그렇게 멈췄다. 찬란한 도시의 문명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죽은 이들의 거리
1827년, 폼페이가 최후의 날을 맞이하고 1800년 가까이 흐른 그해.
스물여덟 살의 러시아 화가 카를 브률로프(Karl Bryullov·1799~1852)가 잊힌 그 도시를 찾았다. 그는 한이 서린 그 땅을 천천히 살펴봤다. 산과 돌, 꽃과 풀 한 포기마저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는 듯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계속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그간 역사에서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등장한 건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 공사를 하던 중 유적과 유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카를로스 3세 때인 1748년에서야 당국이 대대적 조사를 벌였는데, 그때부터 브률로프가 살던 지금까지 발굴이 이어지고 있었다.
브률로프는 러시아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유럽에 온 것이었다. 그는 정부 규정에 따라 한 점 이상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그는 이곳을 거닐며 자기가 뭘 그려야 할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과거 그 순간에 펼쳐진 폼페이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https://v.daum.net/v/20240210002208611
‘초호화 휴양지’ 화산폭발, 2000명 파묻혀 죽었다…그 시절 폼페이서 무슨 일이[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카를 브률로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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