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세상이야기

살인 누명으로 잃어버린 18년의 배상금은 2억여원

바람아님 2014. 5. 7. 08:59
  그의 이름은 왕번위입니다. 1954년 태어났으니까 올해 거의 만 60세 입니다. 인생의 딱 30%인 18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강간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였습니다.

그러다 2012년 진범이 붙잡혔습니다. 지난해 7월 네이멍구 자치구 고급 인민법원은 왕씨에 대한 재심에서 왕씨의 '무죄'를 확정판결했습니다. 혐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석방했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받는 사형수로서의 18년 세월은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 전체를 풍비박산 냈습니다.

왕씨는 얼마전 청명절을 맞아 부모님의 무덤을 돌아보기 위해 옛 집을 찾아갔습니다. 비싸고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웃음과 행복이 넘치던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사방의 벽이 갈라지고 무너져 찬바람이 멋대로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가구는 이미 썩고 내려앉아 제모습을 갖춘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자그마한 침대와 궤짝, 두개의 나무 상자만이 남은 것의 전부였습니다.

왕씨의 고향도 예전의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 외지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고 이제 남은 주민은 십수명에 불과했습니다. 야트막한 산 사이에 크지 않아도 수백명을 품어주던 농경지는 이제 거의 황폐해졌습니다. 퇴락한 마을은 흡사 유령처럼 보였습니다.

왕씨의 아버지는 이미 1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맏아들의 이름을 되풀이하며 불렀다고 왕씨의 여동생은 전합니다.

어머니는 왕씨가 재심을 받을 때까지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큰아들 때문에 끌탕해온 속은 이미 숯덩이로 변했습니다. 이미 반쯤은 저세상에 몸을 들여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죽겠다며 끊어질 듯한 숨을 모질게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왕씨가 석방되기 11일전 그만 기력이 다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큰아들의 얼굴을 끝내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왕씨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버렸습니다. 고향에서 왕씨를 맞은 사촌 형의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래도 몇 마디라도 나눴습니다. 하지만 금방 말이 줄더니 아예 입을 다물었습니다. 몸만 이 세상에 있지 정신은 이미 딴 곳으로 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석방된 뒤 처음 3개월 동안 왕씨를 보살폈던 여동생의 말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뼈에 가죽만 씌워놓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래서는 큰일 나겠다 싶어 날마다 보양식을 먹였습니다. 하지만 3개월 뒤에도 변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여동생은 자신이 하는 야채 노점에 왕씨를 데려가보기도 했습니다. "그저 꼼짝않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손님이 와도 응대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를 부르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3개월 만에 왕씨는 새출발을 하겠다며 새로 집을 구해서 나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화를 쓸 줄도, TV를 켜는 것도, 온수기를 가동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방금 사용법을 열심히 가르쳐주면 돌아서면서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면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했고요. 완전히 부적응 상태였습니다." 여동생의 말입니다.왕번위는 남동생 2명, 여동생 2명을 잘 챙겨주던 듬직한 맏아들이었습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지만 시골이었던 고향에서는 나름 문화인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편지 쓸 일이 있으면 으레 왕번위에게 찾아와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줄곧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마을 협동농장에서는 좋은 일꾼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농장의 경리 업무는 그가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촌민들은 모두 그에게 돈 문제를 맡길 정도로 신망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1989년 35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가난한 생활이어서 아무도 시집을 오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던중 이 마을에 산둥 출신의 한 여성이 두 살난 딸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오래지 않아 왕씨와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3년 동안 그렇게 사실상의 부부로 살았습니다.

1991년 작황이 최악이었습니다. 땅에서 무엇 하나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왕씨는 도저히 더이상 고향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동거녀와 그녀의 딸, 그리고 친척 한 명을 데리고 네이멍구 파오토우시에서 농민공으로 일했습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얼마 뒤 아내는 함께 도시로 나온 친척과 눈이 맞아 달아나버렸습니다. 자신의 어린 딸마저 버렸습니다.

1994년 왕씨는 이옌밍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됐습니다. 외로웠던 왕씨에게 술도 사주고, 재미있는 곳도 구경시켜줘 둘도 없는 친구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왕씨에게 18년의 지옥을 가져다준 계기였을 뿐이었습니다.

1994년 12월15일 저녁에 이옌밍이 허겁지겁 왕씨를 찾아왔습니다. "한 소녀를 그만 죽여버렸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왕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옌밍은 험악한 얼굴로 왕씨를 위협했습니다. "경찰에 신고만 해봐. 너도 그 소녀처럼 만들어주겠어." 그리고 소녀의 시신을 함께 처리하자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날 밤 9시 둘은 소녀의 시체를 삼륜차에 싣고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지역에 암매장했습니다. 하지만 발각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16일 저녁에 경찰들이 왕씨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진범인 이옌밍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습니다. 왕씨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경찰 수사에서 왕씨는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이옌밍이 한 짓이고 자신은 협박에 못이겨 시신을 감추는 것만 도와줬다고. 하지만 경찰은 이옌밍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돌이를 어디서 찾겠냐며 왕씨만 잡아 족쳤습니다. 경찰의 가혹한 고문이 이어지자 왕씨는 그만 두 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홀로 한 짓이라고 인정했습니다.

1996년 11월 왕씨는 네이멍구 인민법원에서 자백을 근거로 강간 살인죄를 인정 받고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왕씨는 옥중에서 자신이 억울하다는 편지를 매달 여동생에게 보냈습니다. 여동생은 왕씨를 위해 아무 일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사형이 집행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2012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진범인 이옌밍이 다른 범죄로 우연히 잡혔다가 18년전의 죄까지 털어놓은 것입니다. 1년간의 재심 끝에 2013년 7월 마침내 왕씨는 죄가 성립되지 않으니 석방하라는 확정 판결을 받습니다.

다만 과거 이옌밍의 시신 유기를 도와준 혐의로 3년형은 인정됐습니다. 15년 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대가로 1백50만 위안, 우리 돈 2억5천만 원을 배상 받았습니다. 쓰촨과 같은 중국 시골에서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망쳐버린 데 대한 배상액으로는 터무니 없었습니다.

왕씨는 이 배상금 가운데 50만 위안은 집을 구하는데 썼습니다. 그리고 3만 위안은 과거 동거녀가 데려왔던 자신의 양딸에게 종잣돈으로 줬습니다. 나머지 97만 위안은 사촌 동생에게 운용을 맡겼습니다. 그 이윤으로 생활비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변의 물음에 왕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저 떠난 아내를 다시 찾아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당시 경찰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경찰들이 제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억울한 누명을 그대로 인정한 재판관은? "이제 와서 무슨 원망을 하겠습니까? 또 해당 재판관은 이미 제게 사과했습니다. 그 당시 법률체계로는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면서. 또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만약 그때 재판관이 사형을 집행하도록 허락했다면 지금의 이런 결과를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너무 선하다 못해 조금 모자란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선량한 사람을 18년 동안 지옥으로 몰고 간 그 사법체계는 어떤 단죄를 받아야 할까요? 그저 손해배상금 2억5천만 원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요? 다시는 왕씨와 같은 비극이 없도록 철저한 제도 개선과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를 추진하는 것만이 그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